[책갈피 속의 오늘]1925년 경성운동장 준공

  • 입력 2004년 10월 4일 18시 34분


성동원두(城東原頭·서울 도성 동쪽의 넓은 벌판). 1925년 10월 5일 모습을 드러낸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의 별칭이다. 낙산줄기가 움츠리고 남산이 채 솟아오르기 전인 평지는 애초부터 무(武)의 기상이 드높았다.

조선후기 수도방위사령부인 훈련도감의 최대 병영이 있던 곳이며 최초의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훈련하던 곳이다. 임오군란 때는 성난 군사들이 무기를 탈취해 봉기했던 의기충천한 곳이기도 했다.

이처럼 서슬 퍼런 지기(地氣)가 침략자에게는 부담이었을까. 일제는 병영을 철거하고 야구장을 지었다. 창경궁을 놀이터로 만든 ‘놀자판 서울 만들기’는 이곳까지 이어졌다.

준공 열흘 뒤 열린 개장 이벤트는 이름부터 발칙했다. 조선신궁봉찬경기대회(朝鮮神宮奉贊競技大會). 관변단체 주관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한마당을 꾸미려는 계획은 민족진영의 보이콧으로 반쪽 행사에 그쳤다. 3·1운동 이후 출범한 조선체육회는 이 대회와 같은 날짜에 따로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전조선 야구대회를 열었으니 민족체육의 가시밭길을 자초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축구장, 정구장이 완공되고 관중석도 정비되면서 경성운동장은 서울의 명물이자 체육인의 보배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연희전문 학생 이영민이 처음 날린 장외홈런(외야석이 없었으므로 구장 너머 숲으로 공을 날려야 홈런이었다)에 전국이 들썩거렸고, 경평(京平)축구에는 2만여명의 인파가 모여 일경(日警)을 긴장시켰다. 우민(愚民)정책을 위해 마련한 운동장이 민족 에너지의 분출구가 되자 일제는 1932년 학생야구를 제한했고, 1938년에는 조선체육회를 강제 해산시킨다.

광복 후 서울운동장이 된 이곳은 군중집회 장소로 변신한다. 반탁과 찬탁집회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1946년 노동절에는 우익은 축구장에서, 좌익은 야구장에서 집회를 갖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훗날에는 박스컵 축구대회와 대통령배 축구대회가 잉태됐으니, 이곳은 민초(民草)의 함성과 정권의 책략이 교차한 아이로니컬한 공간이었다.

현재 청계천변에서 쫓겨난 상인들이 옮겨온 풍물시장과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성동원두’. 그 혈기방장했던 터는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소망하고 있을까.

김준석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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