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명물]서울 노원구 하계동 '한글고비(古碑)'

  • 입력 2002년 11월 15일 18시 08분


노원평생교육관 어린이들이 15일 서울 노원구 하계동 ‘한글 고비’의 비문에 대한 인솔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제공 노원구청
노원평생교육관 어린이들이 15일 서울 노원구 하계동 ‘한글 고비’의 비문에 대한 인솔교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제공 노원구청
‘녕ㅱ 비라. 거운 사ㅱㅱ ㅱ화ㅱ 니브리라. 이ㅱ 글 모ㅱㅱ 사ㅱㅱ려 알위노라.’

서울 노원구 하계동 12 서라벌고 맞은 편에 있는 ‘한글 고비(古碑)’의 왼쪽 옆면에 새겨진 글이다. ‘신령한 비석이다. 건드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글(한자) 모르는 사람에게 이른다’는 뜻이다.

이 비석은 현존하는 한글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조선 개국공신인 성산부원군 이직(李稷)의 4대 손으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종 9품) 벼슬을 지낸 이윤탁(李允濯)과 그의 부인 고령 신(申)씨 무덤 옆에 세워져있다.

이윤탁의 세째 아들인 문건(文楗)이 1536년 부모를 합장한 뒤 한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 묘비를 훼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자와 한글로 비문을 손수 쓰고 새겼다.

지극한 효심 때문이었을까. 약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비석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자녀에게 효(孝) 사상을 가르치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5일 오전에는 노원구 중계동 노원평생교육관 유치원생 20여명이 이 곳을 찾았다. 풀밭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비문에 얽힌 사연을 전해듣고는 어른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원평생교육관 이승연(李承娟) 교사는 “교실에서 효를 가르치는 것보다 교육효과가 훨씬 컸다”며 “다음 견학 시간에도 다시 찾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영비(靈碑)’라고도 불리는 이 비석 때문에 도로가 한동안 우회하기도 했다.

원래 이 비석은 하계동 산 12 나지막한 동산에 있었다. 1990년대 초 이 일대가 개발되면서 도로를 닦기 위해 대한주택공사가 수 차례 이전을 요구했으나 문화재 심의위원회의 반대로 결국 비를 우회하는 기형적인 도로(한글비석길)가 생긴 것.

그러나 왕복 6차로를 시원스레 달리던 차들이 갑자기 급커브를 만나게 돼 사고가 잦아지자 1998년 15m 정도 떨어진 영비각(靈碑閣) 안으로 비석을 옮겼다.

원래 위치에는 지석(誌石·고인의 성명, 출생일, 행적 등을 기록한 판석)을 묻었다.

비석을 관리하고 있는 노원구의 조용덕(趙龍德) 과장은 “한글 고비는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국문 서예에 관한 귀중한 연구자료여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학계에서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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