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문옥배]‘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75주기를 기리며

  • 입력 2006년 3월 16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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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일본에 병탄된 지 4년 뒤인 1914년, 24세의 일본 청년이 조선에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하고 조선인처럼 살다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죽어 조선 땅에 묻힘으로써 일본에서는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으로 더 유명하다. 바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라는 사람이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던 시절, 조선인까지도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을 핍박하고 양곡을 수탈하여 부(富)를 쌓던 때였다. 하지만 다쿠미는 조선의 바지저고리를 입고 조선인처럼 생활했다. 임업시험장 안에서 평소 조선인에게 친절하고 조선인을 차별 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조선인 동료들이나 이웃 사람들이 그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왔고, 조선인 학생 몇 사람에게 장학금도 주었다. 자기는 굶더라도 가난한 조선인 동료나 노동자들을 도왔으나 정작 그가 죽었을 때는 장례비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도 조선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특히 그는 조선의 민속공예와 도자기를 좋아해 ‘조선도자기의 귀신’이라 불리는 친형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1884∼1964)와 함께 조선 전역을 누비며 이를 수집하고 발굴해 ‘조선의 소반’과 ‘조선도자명고’라는 자료집을 남겼다. 일본에서 ‘민예(民藝)의 아버지’라 불리는 공예 이론의 대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와 함께 조선의 민예운동을 이끌면서 1924년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때 두 사람은 기금 마련에 온 힘을 쏟았다. 야나기는 아내 가네코의 음악회 수익금 전부를, 다쿠미는 지갑을 다 털어 부었다. 심지어 다쿠미는 결혼할 때 어머니가 양복을 사 입으라고 준 돈까지 투입했다. 나중에 어머니가 “양복은 사 입었니?” 하고 묻자 “모두 골동품이 되었어요”라고 대답했을 정도로 미술관에 들어갈 민예품들을 사들이는 일에 열정을 다 쏟았다.

이렇게 조선과 조선 사람, 그리고 조선의 공예와 도자기를 사랑하던 그가 1931년 4월 2일 급성폐렴으로 숨을 거둠으로써 17년간의 조선생활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은 다음 날 많은 사람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데, 특히 조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무리를 지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에 흰 조선 옷을 입혀 관 속에 넣어 운구할 때 서울 이문리 사람 중 평소에 그를 따르던 서른 명도 넘는 사람들이 서로 관을 메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장례식 날은 청량리 일대의 길이 막힐 정도였다.

다쿠미의 묘소는 그의 유언대로 그가 살던 이문리 마을 뒤에 묻혔다가 지금은 망우동공동묘지로 이장해 한국 산림청 임업시험연구원(현재는 국립산림과학원)의 임직원과 그를 사모하는 일부 한국인의 손에 관리되고 있다. 묘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1982년 다쿠미의 인간미 넘치는 생애를 그린 책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지음)이 나와 일본인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그가 죽은 지 7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목소리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그칠 줄 모른다. 1994년 에미야 다카유키(江宮隆之) 씨가 ‘그 시대에 이런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일 양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더 알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다’는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전기소설 ‘백자 같은 사람’(1994년 ‘백자의 나라에 살다’로 번역 출간)이 나오면서 지금은 일본에서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제작까지 추진되고 있다.

마침 다음 달 2일은 그의 75주기 추모일이다. 한국에도 그를 존경하고 온 국민이 추모하는 때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

문옥배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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