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21/부패문화를 바꾸자]『민원해결 法은 멀고…』

  • 입력 1999년 1월 27일 19시 07분


《‘누구 아는 사람 없나.’ 명절 때 귀향 열차표를 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아는 사람’, 다시 말해 ‘힘’ 있는 사람을 통하면 줄을 서지 않아도 표를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잘못된 민원의 전형적인 예다. 흔히 ‘민원’으로 불리는 청탁부패는 인연과 정(情)을 중요시하는 우리 문화 속에서 거의 죄의식 없이 행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질서를 깨뜨리는 가장 원초적인 부패다. 민원이 성하면 법은 존재이유를 잃는다. 민원은 또한 힘 있는 사람들의 특권의식과 이기심이 그 출발점을 이룬다. 그들이 정상적인 절차와 순서를 밟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따라간다. 성균관대 행정학과 박재완(朴宰完)교수는 “민원문화와 의식의 개선 없이 부패 척결은 어렵다”고 말하고 “우리도 당장 미국처럼 관청마다 윤리규정을 걸어놓고 청탁이 들어오면 규정을 설명해주면서 이를 거절하는 일이라도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민원 사례를 살펴보았다.》

▼“내사람 그자리에 심자”인사민원▼

광역 지방자치단체인 A도는 지난해 정기인사를 앞두고 총무과에서 마련한 인사기록카드와 도지사 비서실에서 별도로 작성한 ‘인사 민원 리스트’를 함께 놓고 실무작업을 벌여야 했다.

‘을 승진시켜달라’‘을 부서로 보내달라’는 민원이 수백건에 달해 리스트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누가 누구를 부탁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담당자에게 “민원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느냐”고 물었더니 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지자제 실시후 지방마다 폭주하는 것은 인사 민원이다. 예산배정권을 쥐고 있는 지방의원들이 도지사나 시장 군수를 상대로 마구 청탁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국회의원들만 있었지만 요즘에는 지방의원들까지 가세해 인사철이면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몸살을 앓는다.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지난해 말 여의도 의원회관에는 퇴출대상에 오른 은행원들과 공무원들로부터 민원이 쏟아졌다. 국회 재정경제위 소속 한 의원은 “온갖 곳에서 ‘을 퇴출대상에서 빠지게 해달라’는 식의 민원이 1백건이 넘게 들어왔다”고 말하고 “이 중 3분의 1정도에 대해서는 은행측에 선처를 호소했지만 실제로 받아들여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대규모 중하위직 인사를 앞두고 있는 경찰은 요즘 외부 줄대기로 조직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서울시의 한 경찰서장은 “과거 인연이 있는 경찰 고위간부들로부터 전화가 수 없이 걸려오고 있다”며 곤혹스러워 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총경이상 경찰간부들의 승진에는 ‘지역 몫’‘여당 계파 몫’ 등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심각한 것이 경찰의 인사 민원. 기업에도 인사 민원은 만연돼 있다. 실적 위주의 문화가 관(官)에 비해 정착돼 있다고는 해도 사주 쪽이나 권력실세를 통해 들어오는 민원은 그 강도가 관 못지않다. 특히 하청업체는 목줄을 쥐고 있는 대기업의 인사 민원을 뿌리치기가 어렵다.

▼“법보다 인맥으로 해결”사건민원▼

서울 A경찰서의 수사과장 B씨에게는 ‘민원 장부’가 따로 있다. 이른바 힘이 있다는 곳, 영향력이 있다는 곳으로부터 민원이 워낙 많다 보니 아예 장부를 만든 것. 장부의 주요 고객은 △정부 고위공직자 △국회의원 △검찰 △경찰 상급간부 △친인척 등이다. 하루에 걸려오는 민원 전화는 평균 3,4통.

민원인이 어색한 안부인사와 함께 “의 되는 사람” “를 아시느냐”는 식으로 말을 돌리면 B과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어느 쪽이 우리 편입니까. 고소인입니까, 피고소인입니까.”

민원인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지고 B과장은 곧 누구의 무엇을 봐줘야 할지를 알아낼 수 있다. 그는 장부에 간결하게 메모한 후 담당 조사관에게 일러 준다.

B과장 같은 베테랑 수사과장들에게 민원 처리는 업무의 한 부분이 돼 버렸다.업무노트나 탁상일기에는 크고 작은 민원사항들이 항상 메모돼 있다.

민원이 몰리는 곳은 형사과. D형사과장의 말이다

“하루 평균 50여건의 사건을 처리하는데 이 중 50∼60%는 ‘잘 봐달라’는 전화가 반드시 걸려옵니다. 일단 전화를 받으면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아는 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말해주는데 전화를 한 사람의 얼굴을 세워 줘야 하기 때문이지요.”

너나 할 것 없이 민원을 하니까 사건 당사자들은 제쳐두고 뒷 배경인 민원인들끼리 힘겨루기를 벌이는 일도 왕왕 있다. 지난해 서울 E경찰서에서는 같은 반 고등학생끼리의 주먹다짐이 집안간의 ‘민원 전쟁’으로 커졌다. 가해학생과 피해학생 양측이 똑같이 인맥을 총동원한 것. 중간에 낀 경찰은 사건처리를 미루고 눈치만 봐야 했다. 서울지검의 F검사는 “큰 수사를 시작할 때는 아예 전화기를 내려 놓는다”고 말했다. 사건이 크면 관련자도 많아 민원전화가 그만큼 폭주하기 때문에 수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줄서는 사람은 바보”새치기민원▼

서울의 한 대학병원 홍보실장 김모씨. 그는 “입원순서를 당겨달라” “수술을 빨리 받게 해달라”는 민원 전화를 하루에 2,3건씩은 받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누구나 하니까’ ‘아는 사이니까’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을지 모르지만 이런 민원은 범죄와 다를 바 없다. 만약 그 사람 때문에 입원 순서가 뒤바뀐 중환자가 입원도 못하고 숨졌다면 그 책임은 민원 전화를 한 그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죄의식이 없다. 특히 정계나 재계의 이른바 힘있는 사람들은 예약도 없이 전화 한 통화로 몇시간씩 기다리는 사람을 제치고 특진을 받는다. 심한 경우 의사들은 기다리는 다른 환자들 보기가 민망해 연구실에서 이 ‘VIP’들을 진찰하기도 한다.

김씨는 “홍보생활 10년에 약 7천건의 민원을 처리했다”고 말하고 “민원을 한 힘있는 7천명에게는 혜택을 줬지만 ‘빽’이 없어 말없이 차례를 기다린 수십만명의 다른 환자들에게는 피해를 준 셈”이라며 자괴감을 감추지 않았다. 명절 때나 휴가철이면 항공사 철도청 예약담당자들은 홍역을 치른다. 온갖 기관에서 표를 부탁하기 때문.

한 항공사의 예약담당자는 “컴퓨터로 예약을 받아 처리하기 때문에 안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라고 말하고 “이들은 특권의식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들 같다”고 말했다. K고속의 한 예약담당자도 “며칠전부터 매표구 앞에서 기다리는 보통사람들을 한번쯤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명절 때면 승객이 몰리는 탓도 있지만 때로는 소수의 힘있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특별기나 특별열차가 추가로 배정되기도 한다.

제주도 속초 등 휴양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휴가철이면 콘도나 호텔방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한다. “방 잡아달라”는 민원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제 때 방을 잡아주지 못하면 아무리 일을 잘해도 “융통성 없는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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