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까지 6개월 2000km… 국서전달로 대장정 마무리

허진석기자 입력 2015-12-15 03:00수정 2015-12-1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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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제2부 조선통신사의 길]<10·끝>한일 우호를 향한 여정
에도 막부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 있는 닛코 곳곳에는 통신사들이 남긴 유물이 많이 남아있다. ①평소엔 살벌했지만 조선통신사들만큼은 검문도 하지 않고 통과시켰던 하코네 검문소. ②윤왕사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효종의 어필. ③도쿠가와 무덤 앞에 놓인 삼구족(화병 향로 촛대). ④윤왕사에 있는 청동 등(燈). 맨 앞에 ‘朝鮮國(조선국)’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사헌부 대사헌 채유후(1599∼1660)가 쓴 글을 종에 새긴 것으로 통신사들이 가져온 것이다. 윤왕사 제공·닛코=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통신사는 목적지인 에도(지금의 도쿄)에 들어가기 전 지금의 가나가와(神奈川) 현 하코네(箱根)에서 검문소(關所·세키쇼)를 통과해야 했다. 에도 막부는 지방 번주(藩主)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검문소를 엄격하게 관리했다.

검문소를 거치지 않고 다른 길로 들어오려다 발각되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극형에 처해졌다. 방법도 옆구리부터 어깨까지 창을 대각선으로 찔러 죽이든지, 단칼에 목을 벤 후 3일간 머리를 효수해 공포감을 조성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무단으로 산을 넘어 에도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이면 즉각 신고해야 했고 누군가가 무단으로 통과한 것이 밝혀지면 마을 사람 전체가 처벌을 받았다. 에도 부근에서 가장 살벌한 검문소가 바로 하코네 검문소였다.

9월 1일 찾은 하코네는 풍광 좋은 아시노(蘆ノ) 호수 곁에 있는 조용한 관광지였다. 그 옛날 검문소는 길을 가로막은 2개의 문과 그 사이 부속 건물로 이뤄져 있었다. 두 문 사이의 거리는 어른 보통 발걸음으로 47보가량 됐고 양쪽 문 사이에 사무실, 검문소 숙소, 마구간 등이 길 양옆으로 배치돼 있었다.

통신사들은 이곳을 무사통과한 것은 물론이고 대대적인 환영도 받았다. 야마우치 게이(山內圭) 관장은 “당시 검문소 기록을 살펴보면 통신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청색 장막(帳幕)이 특별한 손님들이 통과할 때만 달리는 흰색으로 바뀌고 접객실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등 대단한 준비를 했다고 나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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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신사 행렬의 주인공 ‘국서’

한양(서울)을 떠난 통신사들은 평균 약 6개월간의 여정 끝에 목적지 에도에 당도했다. 에도는 이미 인구 100만 명의 대도시였다. 일행들은 도착 첫날 바로 숙소인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로 향했는데 가는 길에 번화가인 니혼바시(日本橋) 부근을 지났다. 1711년 통신사 사행록인 ‘해유록(海游錄)’은 주변 풍경에 대해 ‘빽빽하게 들어선 인가와 상점, 화려한 옷차림의 구경꾼들이 오사카의 3배 이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통신사들이 니혼바시 인근을 지나는 장면은 ‘조선인내조도(朝鮮人來朝圖)’라는 이름의 그림에 잘 남아 있다. 번화한 거리와 화려한 옷차림의 에도 사람들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조(來朝)’는 ‘조공(朝貢)의 일로 온다’는 의미이다. 에도 막부가 통신사들을 국민들에게 그런 식으로 선전을 했거나 아니면 아예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신사의 최종 임무는 당시 최고 지도자 쇼군(將軍)을 만나 국서(國書·국가 이름으로 보내는 외교 문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더위가 가시지 않았던 9월 6일 일요일 아침 에도 성을 찾았다. 성의 일부 안쪽과 바깥 공간은 공원으로 개방돼 있어 휴일 아침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일왕은 현재 성 서쪽 구역에 기거하는데 일반인의 출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통신사들이 지참한 국서는 모든 번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한 전달식이 치러졌다. 현재 에도 성에는 통신사 일행이 통과한 정문만 그대로 남아있다. 전달식이 열렸던 장소도 잔디밭 어딘가로 추정된다.

○ 닛코까지 간 사연

국서를 전달한 통신사들은 쇼군의 답서가 작성되기를 기다리며 한 달가량 머문 뒤 돌아갈 때 사용할 배와 일꾼들이 기다리고 있는 오사카로 돌아가는 것이 통례였다.

그런데 1636년 4차 통신사는 국서 전달이 끝났음에도 오사카로 바로 가지 못했다. 에도 막부가 에도에서 150km나 북쪽에 있는 닛코(日光)까지 가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정사(正使) 임광은 처음엔 거절했다. 일본 방문 목적은 두 나라의 태평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일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청나라 위협이 거세지고 있는 때이기도 해서 귀국을 서둘러야 했기도 했다. 무엇보다 닛코는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사당 도쇼구(東照宮)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사당 참배는 명분 없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 막부가 통신사들에게 닛코행을 강력하게 청한 배경에는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다. 도쇼구는 대대적인 중건(重建)을 마무리해 1636년에 새 단장을 마친 터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손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조부를 기리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 약 1만5000명의 장인과 45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작은 신사를 금박으로 장식한 화려하고 웅장한 곳으로 탈바꿈시킨 터였다.

에도 막부는 화려한 사당을 조선에 보임으로써 막부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통신사들이 사당에 들렀다는 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면 막부의 권위를 높일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막부의 요청이 거듭되자 결국 통신사들은 “유람만 하겠다”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이후 1643년과 1655년의 5, 6차 통신사들도 닛코를 찾았다.

닛코 인근 도치기(회木) 현 이마이치(今市) 시에 있는 수차(水車)공원은 통신사들이 묵었던 숙소 터이다. 에도 막부는 당시 보리밭이던 이곳에 에도에서 가져온 건축 자재로 100칸이 넘는 숙소를 만들었다. 민단 도치기현본부는 2007년 조선통신사 400주년을 기념해 이곳에 객관터 유적비를 세웠다. 현장을 안내해 준 한상영 사무국장은 “유적비 건립은 닛코 시와 현지 역사연구가들과의 협력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400년 전 선조들의 발길이 오늘날의 교류 협력으로도 이어진 것 같아 뿌듯했다”고 말했다.

○ 연 1200만이 찾는 관광지 속 ‘작은 조선’

도쿄 역에서 기차를 타고 약 2시간을 달리면 도부닛코(東武日光)역에 도착하고, 거기서 차로 10분가량 가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과 무덤이 있는 도쇼구와 일본 천태종의 본산인 윤왕사(輪王寺·린노지)가 나온다. 9월 5일 토요일, 유명 관광지답게 역 앞의 상가와 윤왕사 일대는 사람들로 붐볐다.

닛코 시는 인구 9만 정도의 작은 도시지만 관광객은 연간 1200만 명에 이른다.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찾는 곳이 도쇼구와 윤왕사이다. 우선 윤왕사에는 귀한 유물이 있었는데 효종의 친필이었다. ‘靈山法界 崇孝淨院(영산법계 숭효정원)’이라는 글로 ‘신령스러운 정기와 불교적 기운이 가득한 곳에 있는 효를 숭상하는 정결한 장소’라는 의미였다. 스즈키 조겐 스님은 “사람의 인품을 느낄 수 있는 강직한 글씨”라며 “효종의 친필을 포함해 거문고와 피리 등 여러 조선통신사 유물을 1년에 한 차례씩 번갈아가며 특별전시를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윤왕사의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 화려한 장식을 뽐내는 가라몬(唐門) 앞에 도착했다. 앞 널찍한 공간의 좌우에 어른 키보다 높은 청동 등(燈)이 20여 개 서 있는데 그중 2개가 조선통신사의 유물이었다.

도쇼구에도 조선이 보낸 동종이 걸려 있었다. 동종은 쇼군 이에미쓰가 마흔 살에 아들을 얻은 것을 축하해 주는 사절로 1643년 5차 통신사가 올 때 가져온 것이다. 닛코에 남아있는 통신사 유물들 중에는 종이 많이 있었는데 이는 에도 막부가 요청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구리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막부는 쓰시마에서 구리와 납을 제공할 테니 그렇게라도 만들어 달라고 청했다.

○ 신의의 상징

통신사 유물의 절정을 느낀 것은 도쇼구 깊은 곳에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 앞에서였다. 무덤 앞에 놓인 삼구족(三具足·화병, 향로, 촛대)이 바로 조선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1812년 불에 타 없어진 것을 막부가 재현해 놓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런 역사를 알리는 일본어나 영어 안내문은 없었다.

지금까지 한일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양국의 평화와 공존·공영을 위해, 때론 목숨까지 위태로운 사태를 겪으며 약 4000km의 길을 왕복했던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최대한 훑어보았다. 통신사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평화의 드라마’는 양국 관계가 좋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불구대천의 원한이 쌓였을 전쟁(임진왜란)이 끝난 뒤 200여 년이나 양국이 문화 교류의 꽃을 피웠다는 점은 세계사에서도 귀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통신(通信)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로써 교류한다는 의미다. 강남주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기록유산 한일공동등재 한국 측 학술위원장은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의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의 말처럼 지금의 한일 관계를 푸는 실마리는 ‘싸우지 않고 속이지 말며 진실로 대하는 것’뿐”이라며 “400여 년 전 양국 우호 교류의 역사가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씨앗이 되기를 고대한다”고 말했다.

도쿄·닛코=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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