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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살아보니]유국흥/화교 돌아오도록 ‘열린 마음’을

입력 2003-12-26 18:19업데이트 2009-10-10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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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화교의 효시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따라 들어온 40여명의 상인들이다. 인천 선린동 일대에 조계지가 세워져 중국 건축양식을 본뜬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곳이 화교의 근거지가 됐다. ‘차이나타운’의 최초 형태였다.

그 뒤의 우여곡절을 장황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2년에 한번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거류제도 등 각종 규제로 인해 70년대 초 12만명을 헤아리던 화교 인구가 현재 2만2000여명으로 줄었고, 과거 화교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던 서울 명동 북창동 소공동과 인천 선린동은 차이나타운의 정취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퇴락했다. 법적 제도적 차별과 한국인들의 배타성으로 인해 많은 화교들이 삶의 터전을 미국 대만 일본 등지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이런 탈(脫)한국 행렬은 92년 한중 수교, 98년 200평 이하로 소유가 제한됐던 외국인 부동산관련 법규의 개선, 2002년 5월 영주권 제도의 시행 등으로 주춤하고 있다. 특히 영주권 제도의 시행은 언제 이 땅에서 추방될지 모르는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불안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 최대의 쾌거였다.

우리는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 한국에 들어와 세금도 꼬박꼬박 내며, 병역의무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한국 국민의 의무를 다했다. 하지만 우리는 집 달력에 붉은 글씨로 비자 갱신일을 표시하고, 혹 하루라도 늦을까 노심초사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실제 비자 갱신이 늦어 벌금을 내거나 일부러 해외여행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의 고단한 삶은 6·25전쟁 참전 화교 병사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처리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우리는 ‘또 하나의 조국’인 한국을 수호하기 위해 조상의 나라 중공의 군인들을 향해 총을 들었고 가장 위험하다는 후방교란 업무도 수행해 생존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희생이 컸다. 그러나 화교 참전용사들은 ‘군번 없는 군인’이라는 이유로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몇 안 남은 생존 노병들은 이제껏 참전기념비 건립 같은 소박한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영주권 제도 등 최근의 제도개선 덕분에 한국을 떠났던 화교의 일부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생겼다. 외환위기 이후 해외 화교네트워크와의 연계 추진 및 해외 화교자본 유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화교의 중요성도 차츰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한국 화교들은 그동안 각종 규제로 국제 화교네트워크에 참여할 역량과 세력을 키우지 못했다. 이에 따라 유동자금 규모만도 2조달러가 넘는다는 세계 화교자본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

화교자본의 네트워크는 단순한 경제논리보다 문화적 연계를 앞세우는 특성을 갖는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에는 그런 문화적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차이나타운도 없다. 다행히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 옆에 2만여평의 차이나타운이 곧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한국 사회와 정부가 화교자본을 끌어들이고 진정한 세계화와 동북아 경제중심을 구현하려면 개선해야 할 것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배타성이 문제다. 한중 수교와 세계화 분위기 속에서 화교에 대한 배타성도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속의 차별의식을 없애는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국흥 한중일보 사장·전 한성화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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