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41>4부 ⑦서해교전과 '한철용 항명'

입력 2003-10-22 18:07수정 2009-10-10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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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서해교전 이후 벌어진 군 수뇌부의 첩보 묵살 논란은 군이 정치 기류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2002년 10월 4일 국방부 국정감사장에서 5679부대장인 한철용 소장이 군 수뇌부가 수차례에 걸쳐 북한군의 도발 징후를 묵살했다고 폭로하며 기밀문서인 ‘블랙북(북한 첩보 일일보고서)’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6·29 서해교전이 발발한 지 10여일 뒤인 2002년 7월 10일.

영내 공관에서 참모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한철용(韓哲鏞·육군 소장) 북한감청부대(5679부대)장에게 부관이 다가와 한 장의 메모를 건넸다.

‘내일 국방부 장관실로 출두, 서해교전 관련 경고장을 받을 것.’

북한군 기습에 대한 대응작전과 정보판단에 문제가 있었다는 조사결과에 따라 한철용과 문정일(文證一) 해군 작전사령관, 권영재(權寧載)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 정병칠(丁炳七) 해군 2함대사령관에게 징계처분이 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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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용은 ‘난데없는’ 징계에 격분했다. 곧바로 오치운(吳治雲) 국방부 차관보에게 전화를 걸어 소리쳤다. “저, 경고장 받으러 안갑니다. 내일자로 전역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군 장성이 국방부 수뇌부에 항명(抗命)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순간이었다. 파문이 확산되자 이남신(李南信) 합참의장은 한철용에게 전화를 걸어 30여분간 달래고 설득하는 등 수습에 나섰지만 한철용은 요지부동이었다.

한철용에 대한 징계는 다음날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이 교전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전격 경질됨에 따라 ‘없었던 일’이 됐다. 그러나 얼마 뒤 일부 언론에 한철용의 항명사건이 보도되면서 파장이 엉뚱하게 번졌다.

당시 상황에 대한 5679부대 관계자의 증언. “군 수뇌부는 막판까지 한철용을 타일러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한철용이 항명했다는 소문이 곳곳에 퍼졌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2002년 10월 4일 국정감사장에서 ‘한철용 파문’이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서해교전과 관련한 한나라당 박세환(朴世煥)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에 나선 한철용이 폭탄선언을 한 것.

“장관이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지휘부에 충성하느니 차라리 전역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국감장은 술렁거렸지만 한철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밀문서인 ‘블랙북(북한첩보 일일보고서)’을 흔들며 “수차례 도발징후 첩보를 보고했지만 김동신 장관이 묵살했다. 그리고는 교전사태가 나자 오히려 국군기무사령부를 동원해 우리 부대를 표적 수사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준(李俊) 국방장관은 급히 “한철용의 보고내용 중 도발을 결정적으로 암시한 대목은 없었다. 또 김동신 전 장관이 정보보고를 묵살한 적도 없었다”고 해명하며 사태수습에 나섰다. 이어 곧바로 한철용을 군기문란으로 보직해임시켰지만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야당은 군 수뇌부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북한의 도발징후를 무시, 아군 전사상자 25명을 낸 서해교전 사태를 초래했다고 파상적 공격을 가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론도 확산됐다.

한철용이 왜 이처럼 ‘항명사태’를 일으켰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 시각이 엇갈린다. 한철용을 지켜본 한 전직 군 정보기관 관계자는 “서해교전 직후부터 한철용은 군 수뇌부가 교전의 패인을 부하에게 전가한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김동신이 햇볕정책을 의식해 도발징후를 묵살했다 뒤늦게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군 일각에선 한철용이 평소 김동신 장관이나 권영재 정보본부장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항명이 사적인 ‘구원(舊怨)’ 때문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한 군 관계자는 “한철용이 국가정보원 파견근무시 연루됐던 ‘보물선 사건’ 때문에 나중에 검찰에서 9시간이나 조사를 받았을 때 김동신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 주지 않은 데 대해 대단히 서운한 감정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경위가 어떠했든 한철용의 폭로로 군 당국은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게 됐다. 교전 이전 북한 동향에 대한 정보 판단이 안이했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었다.

당시 북한경비정은 6월에만 4차례나 서해 북방한계선을 잇달아 침범했지만 군은 매번 꽃게잡이를 하던 북한 어선의 단속을 위한 ‘단순 월경’이라는 답변을 되풀이했다.

교전 발발 보름 전 합참 정보부서는 “99년 연평해전 이후 북한경비정의 NLL 침범이 줄었고 별다른 특이점이 없다”고 장담했고 6월 20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보고된 북한군 동향에도 6월 11일과 13일 침범은 단순침범이라는 최종 결론이 포함됐다.

특히 교전 직전인 6월 27일과 29일에는 연평해전 이후 처음으로 중무장을 한 SO-1급 북한경비정이 침범했지만 군 당국의 판단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 대한 군 당국의 공식 입장은 “당시 합참 등 군 정보당국의 판단에는 문제가 없었다. 매년 꽃게잡이 철마다 북한경비정의 NLL 침범은 ‘연례행사’였다. 군의 판단은 관련 첩보들을 토대로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내에서는 상반되는 주장도 제기된다.

대북 정보부서에 있는 C씨의 증언. “단순침범으로 보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았다. 당시 국정원에서도 교전 가능성을 포착했다는 얘기가 군내에 파다했다. 하지만 이를 적극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남북정상회담을 했고, 월드컵까지 개최한 상황에서 ‘설마…’하는 방심도 작용한 측면이 있었다.”

실제로 서해교전이 북한의 계획 도발임을 뒷받침하는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북한 경비정이 아군 고속정을 기습한 시간을 전후해 북한군 서해기지에 군 헬기가 대기 중이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군 정보부서의 한 관계자는 “당시 북한 경비정은 남한이 월드컵 등으로 해이해진 분위기를 틈타 ‘치고 빠지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해군의 강한 반격으로 예상보다 큰 피해가 나자 당황하는 모습이 감지된 첩보가 여러 건 있었다”고 말했다.

대비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 교전인 만큼 아군 피해가 발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군 지휘부는 교전 피해 등과 관련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자 기무사를 통해 내부조사에 착수하는 등 관계자에 대한 문책 조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됐다.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국방부는 특정지휘관에 대한 문책은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비칠 수 있어 최대한 피하려 했다. 그러나 도발징후 간과, 교전초기 판단착오 등의 ‘실수’가 속속 드러나면서 칼을 빼드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고 말했다.

한철용의 불만은 그런 과정에서 생겨난 것. 한철용은 김동신의 전격 경질로 자신에 대한 징계가 흐지부지되자 문두식(文荳植) 기무사령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정확한 책임 소재를 가려줄 것을 요구했을 정도로 당시 군 지휘부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별 반응이 없자 한철용은 국정감사장에서의 폭로라는 ‘극한행동’에 나선 것. 한철용은 국감 폭로 이후에도 김동신이 교전 이전 북한군의 도발 가능성을 보고한 첩보의 일부 항목을 삭제토록 지시했다는 내용이 적힌 부하 장교의 자필 경위서를 공개하는 등 강경일변도였다. 이에 대해 군 수뇌부는 김동신이 북한 경비정의 침범 배경에 대해 재정리하라는 지시는 했으나 삭제 지시는 절대 없었다고 반박했고, 결국 사건은 국방부 특별조사단의 조사로 넘어갔다.

조사 결과는 김동신이 예하부대의 정보보고 내용 중 일부 항목을 삭제토록 사실상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나 군 수뇌부가 도발징후를 묵살했다는 한철용의 주장은 과장됐다는 것으로 나왔다. 한철용은 이에 따라 정직 1개월의 처분을 받고 전역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주한미군은 한철용이 전역한 직후 공로훈장을 수여키로 결정했다. 5679부대장으로 한미군간 정보 교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징계를 받은 한철용에 대한 훈장 수여는 곤란하다는 국방부의 ‘제동’으로 훈장은 지금까지 수여되지 않고 있다.

국방부 특조단에 참가했던 한 군 관계자는 “한철용의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서해교전을 전후한 시점에서 군 수뇌부와 예하 지휘관들의 허술한 대처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고 지적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8字-15字첩보'뭐였을까…“우발상황 가장 교전준비 암시”▼

6·29 서해교전 발발 전 5679부대장인 한철용 소장이 북한군의 유력한 도발 징후라고 상부에 보고했다고 밝힌 ‘8자’와 ‘15자’의 첩보는 어떤 내용일까.

한철용은 이에 대해 “평생을 군에 몸담은 사람으로 어떤 경우에도 군기밀을 외부에 공개할 순 없다.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한철용은 “그간 여러 차례 밝혔듯이 ‘8자’는 매우 특이한 징후였고 ‘15자’는 결정적 징후였다. 그런데도 햇볕정책을 의식한 당시 군 수뇌부가 이를 묵살해 서해교전의 희생을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교전 발발 보름 전에 포착된 ‘8자’는 우리 입장에서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불도그(bulldog·북한군)가 있다’, 교전 발발 이틀 전에 포착된 ‘15자’는 ‘사나운 불도그이다’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으로 북한의 도발을 암시하는 ‘팩트(fact)’라는 것. 군 내부에선 당시 5679부대가 포착한 ‘8자’와 ‘15자’의 대북 감청첩보는 각종 음어와 암호로 이뤄진 북한 해군지휘부의 교신내용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북한군 수뇌부간 또는 해군지휘부와 예하 부대간에 이뤄진 이 교신 내용에는 남한 해군에 대한 사전도발 의도를 암시했거나 우발적 상황을 가장한 ‘교전 준비훈련’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군의 한 관계자는 “통상 북한군의 작전 지시는 ‘이러이러한 목적으로 실시한다’는 등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전후 상황을 유추 해석해야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며 “이 점에서 당시 첩보는 북한 해군지휘부가 우연을 가장해 북한 경비정을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으로 내려 보냈다는 ‘증거’가 포함된 교신내용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표면적으론 단순 침범으로 보이지만 향후 교전에 대비한 ‘떠보기’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와 용어, 서술어 등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다른 군 관계자는 “기술적으로 감청 대상은 주로 무선통신인데 반해 북한군 지휘부의 중요한 작전 지시는 주로 유선통신을 통해 이뤄진다”며 “분명한 도발 의도를 암시하는 첩보라면 당시 군 수뇌부가 어떻게 이를 묵살했겠느냐”고 반박했다.

윤승모기자 ysmo@donga.com

▼특별취재팀▼

▽팀 장=이동관 정치부장

▽정치부=반병희 차장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윤상호 이명건 이승헌 기자

▽경제부=홍찬선 박중현 김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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