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국민의 정부]<31>3부 ⑤현대家 왕자의 난(下)

입력 2003-08-06 18:56수정 2009-10-1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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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과 5월 벌어진 ‘왕자의 난’은 현대그룹의 계열분리를 초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북사업을 주도했던 정몽헌 회장 계열회사들의 잇단 몰락을 가져왔다. 2000년 11월 20일 정 회장이 부도에 몰린 현대건설의 자구안을 발표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현대건설이 이번엔 1차 부도를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2000년 10월 29일 오후 10시쯤. 이연수(李沿洙) 외환은행 부행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김경림(金璟林) 행장에게 전화로 긴급보고를 했다. 이날 현대건설은 만기가 돌아온 260억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했다.

이미 현대그룹의 모(母)기업인 현대건설은 ‘왕자의 난’과 ‘3부자 퇴진 파문’ 직후인 2000년 6월부터 급격한 자금난에 빠져 들었다. 현대그룹 전반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쌓인 데다 건설경기 침체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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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김 행장은 현대측에 해결책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으나 현대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1차 부도를 내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사태는 하루하루 긴박의 도를 더해가고 있었는 데도 당시 정몽헌(鄭夢憲·MH) 현대그룹 회장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금융감독위원회의 한 고위 간부는 “당시 현대는 대북사업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청와대를 너무 믿고 방심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근근이 해를 넘겼지만 2001년이 되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2001년 3월 30일과 4월 1일에 걸쳐 2000억원의 어음 만기가 돌아왔지만 현대건설은 막을 돈이 없었다.

이 부행장의 증언.

“삼일회계법인에 의뢰해 2000년 현대건설의 부실상황을 알아봤더니 적자 규모가 무려 3조6000억원이나 됐습니다. 예상을 훨씬 넘는 심각한 상황이었죠.”

같은 해 3월 26일과 27일 청와대 서별관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현대 관련 경제장관 간담회에서도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3월 28일 오전 7시. 서울 강남의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에는 한국의 경제 부처 주요 인사가 속속 모여들었다. 현대건설의 ‘퇴출 여부’를 최종 결정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기호(李起浩)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권오규(權五奎) 재정경제비서관(이상 청와대), 진념(陳稔) 부총리, 변양호(邊陽浩·현 금융정책국장) 경제정책심의관(이상 재정경제부), 이근영(李瑾榮) 금감위원장, 김석동(金錫東·현 감독정책1국장) 감독총괄과장(이상 금감위), 금융감독원의 강기원(姜起垣) 부원장보, 정성순(鄭成淳) 국장, 외환은행 김 행장과 이 부행장.

참석자들은 모두 굳은 표정이었다. 현대그룹의 상징이자 한국 경제 신화의 견인차였던 현대건설의 퇴출이 주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진 부총리가 먼저 서두를 꺼냈다.

“현대건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지혜를 모아주기 바랍니다.”

이 금감위원장이 이어받았다.

“마침 현대건설에 대한 처리방안을 분석한 것이 있으니 들어보자”며 금감위 김 과장에게 브리핑을 하라고 눈짓을 했다. 김 과장은 밤을 새워 만든 20여 페이지의 보고서를 차례로 설명했다.

“현대건설이 쓰러지면 10조원에서 많게는 28조원까지의 국가 경제 손실이 발생합니다.” “대우에 이어 터지는 것이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현대건설에 유동성을 지원해 회사는 살리되 지배구조는 바꿔야 한다’는 것이 금감위에서 만든 보고서의 뼈대였다. 이어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현대건설 경영정상화는 불가능한 것 아니냐. 법정관리로 처리해야 한다.”(변 경제정책심의관)

“현대건설의 전환사채(CB) 발행에 신용보증기금에 보증을 서게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김 외환은행장)

이 경제수석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법정관리를 부르짖던 다른 관료들도 더 이상 주장을 펼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인사의 진술.

“현대건설 침몰이 몰고 올 경제 충격이 28조원으로 계산된 반면 현대건설을 살리는 데는 2조9000억원만 투입하면 된다는 주장이 강경기류를 바꿔 놓았습니다. 게다가 1조4000억원은 기존 대출금을 주식으로 전환(출자전환)해 주는 것이어서 채권단 추가부담은 1조5000억원에 불과했죠. 이 때문에 채권단의 동의를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전 7시에 시작된 논의는 낮 12시가 돼서야 가닥이 잡혔다. 진 부총리는 “그럼 출자전환을 통한 은행관리로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이 채권단 관리로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는 곧 현대그룹의 사실상 해체를 의미했다.

김 감독정책1국장의 증언.

“3월 26일 이근영 위원장의 지시를 받고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현대건설이 법정관리로 갔을 때의 충격을 계산하기 위해서였죠. 작업이 끝난 시간이 오전 6시경이었는데 옷도 못 갈아입고 바로 회의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르네상스호텔 회의가 끝날 무렵 누군가 “후임 사장은 누가 좋은지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냈다.

다시 김 국장의 증언.

“누군가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심현영(沈鉉榮)씨가 적임자라고 얘기하자 채권단 대표들도 ‘그 정도면 무난하다’고 맞장구를 쳤다. 나는 그때 (심현영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주인이 바뀌게 된 현대건설 새 사장도 그렇게 ‘르네상스 대책회의’에서 낙점됐다.

하지만 최대주주인 MH 설득이 문제였다.

금감위의 고위 간부는 “채권단이 출자전환을 하자면 대주주가 자신의 지분을 포기한다는 동의서에 사인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만만치 않은 고비였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3월 30일 오후 서울 하얏트호텔. 이 위원장은 일본에서 귀국한 MH와 마주 앉았다. 이 위원장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현대건설은 채권단이 출자전환을 해주지 않으면 곧바로 부도가 날 수밖에 없어요. 잘 아시겠지만 출자전환을 하자면 대주주 지분을 모두 소각처리해야 합니다.”

잠자코 있던 MH가 침통한 표정으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할 수 없지요. 따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MH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현대 계열사 K사장은 “현대건설을 채권단에 내 주는 것으로 결정된 뒤부터 MH의 얼굴에는 부쩍 수심이 가득했다”고 전했다.

MH의 비극은 이렇게 사방에서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마침내 5월 18일 현대건설 주총이 열린 계동사옥. 출자전환 안이 통과되면서 현대건설은 현대그룹과의 연(緣)을 완전히 끊는다.

현대그룹 핵심인사 L씨의 회고.

“MH는 모기업인 현대건설만은 절대로 남의 손에 넘길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당하기엔 부실이 워낙 커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또 다른 현대의 핵심 관계자는 “현대건설이 몰락한 결정적 원인은 대북 지원으로 1억5000만달러를 송금한 것이었지만 ‘왕자의 난’으로 계열분리가 이뤄짐으로써 자동차 중공업 등 상대적으로 사정이 좋았던 다른 형제기업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것도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다 ‘왕자의 난’으로 현대그룹 해체위기감이 커지자 2000년 4∼5월 두 달간 삼성카드 2000억원을 포함해 금융기관들이 현대건설의 ‘돈줄’이었던 현대상선에서 회수한 자금만 4151억원에 달해 단기차입금이 많았던 현대건설 등 MH의 계열사들은 더욱 자금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렇게 보면 ‘왕자의 난’은 현대건설의 몰락과 MH의 몰락을 함께 초래한 시발점이었던 셈이다.

이채로운 점은 당시 대북사업 등으로 현대와 긴밀한 대화창구를 가동하고 있던 청와대가 현대건설의 은행관리 결정에 별다른 제동을 걸지 않았다는 점이다.

금감위 고위 인사는 “르네상스호텔의 최종 회의에서도 청와대 참석자들은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고 기억했다.

이는 청와대로서도 현대건설이 이미 독자경영을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빠진 만큼 신통한 묘수가 없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정치의 비정한 논리’를 다시 한번 보여준 사례인 셈이기도 했다.

▼현대의 힘!▼

“재벌의 힘이 그렇게 무서운 줄 처음 알았다. 나와 이헌재(李憲宰) 재정경제부 장관의 경질에 현대 입김이 적잖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2000년 8월 7일, 이용근(李容根) 금융감독위원장은 이날 단행된 개각(改閣)에서 자신이 경질되자 몇몇 기자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놨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현대그룹 유동성 위기 해결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경제부처간에 벌어진 알력이 개각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당시 이 장관과 이 위원장은 채권단을 앞세워 현대의 고강도 자구책과 가신(家臣) 경영진의 퇴진을 강하게 요구했었다.

채권단의 고위 간부 A씨의 증언.

“채권단이 가신 그룹의 퇴진을 요구한 것은 사실상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회장이 표적이었다. 그러나 현대그룹 내의 분란을 야기한 가신 그룹의 퇴진을 주장했던 경제장관들이 도리어 경질 당한 셈이었다.”

이 장관도 당시 “현대가 청와대와의 직거래를 통해 구조조정 없이 편법으로 유동성 위기를 넘기려 한다”며 못마땅해 하는 얘기를 사석에서 하곤 했다.

이어지는 채권단 간부의 증언.

“정부와 채권단이 이 회장의 퇴진을 요구했지만 현대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이 회장은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믿는 언덕’을 확보했기 때문이라는 말로 들렸다.

이 위원장은 퇴임 후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당시 이기호(李起浩)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현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 회장이나 김재수 현대 구조조정위원장과 연락이 안돼 (구조조정의) 진척이 안 됐을 때 이 수석에게 연락하면 그들의 거취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도 비슷하게 기억을 했다.

“이 회장은 자주 청와대 관계자를 만나 경제팀(경제장관들)이 현대를 지나치게 압박한다고 하소연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연수(李沿洙) 당시 외환은행 부행장은 “이처럼 현대 경영진이 청와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특검 결과에서 보듯 ‘대북사업’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홍찬선 김동원 박중현 김두영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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