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달콤 짭조름한 천북 굴, 그 놈 술도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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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30일 07시 00분


7.태안~보령<상>

천북 굴구이집에서의 점심식사. 아직 굴 껍데기가 폭발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이어서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으나 잠시 후 상황이 벌어지면서 자전거 헬멧과 보안경으로 중무장하고 굴을 먹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천북 굴구이집에서의 점심식사. 아직 굴 껍데기가 폭발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이어서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으나 잠시 후 상황이 벌어지면서 자전거 헬멧과 보안경으로 중무장하고 굴을 먹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해안따라 빼곡하게 들어선 굴구이집
집게 쥐고 굴 껍데기 튀는 굴지뢰밭 속으로 돌격
불쬔지 2분만에 굴 입이 쩍…바
닷물 천연 간도 제대로
꿋꿋하게 맛보는 중무장 식객, 그 내공에 감탄이…
맥주 한 모금 마시고 굴 한 점 꿀꺽
진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겠네


“날을 제대로 잡으셨네요. 하필 그날 거기에….”

“글쎄 말이야.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고 표현하기엔 너무도 충격적인 참극이 벌어졌어….”

집단가출 자전거 전국 일주 일곱 번째 투어의 화제는 일본 동북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이었다. 허영만 화백은 지진이 일어난 11일, 회갑을 맞은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휴가여행을 떠났는데 나리타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규모 9.0의 강진을 겪은 것이다. 허 화백은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귀국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자전거 여행을 계속했다. 하지만 페달링을 하면서도 마음은 무겁고 머리는 복잡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난번 6차 투어의 종료 지점인 홍성군 궁리에서 라이딩을 시작한 나그네들은 해안도로를 따라 군산을 겨냥해 남하한다.

2월에 비해 봄기운이 더욱 짙어진 바다는 드넓은 갯벌 위에서 아지랑이로 어른거렸다. 이 세상의 바닷물은 모두 하나로 연결된 것이어서 이웃 나라의 한 해안을 덮쳐 쑥대밭으로 만든 물과 우리가 지금 자전거로 지나는 이 해안도로의 갯바위를 부드럽게 핥고 있는 물은 절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극의 지점과 닿아있는 3월의 바다는 그저 무표정하게 펼쳐진 채 봄 햇살을 받아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일 뿐 말이 없다.

궁리, 상황리, 어사리로 이어지는 홍성의 해안도로는 자전거를 위한 길이었다. 해안선이 큰 굴곡이나 언덕 없이 부드럽게 뻗은 데다 자동차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도록 가드레일이 튼실하게 설치되어 있다.

게다가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갯가에 마구잡이로 들어선 흉측한 건물이 비교적 드물고, 스티로폼 등 그 흔한 쓰레기도 보이지 않아 호젓한 해안 라이딩의 진수를 느끼게 해준다.

이런 길이라면 비록 아스팔트 포장도로지만 페달링이 경쾌해 모두 휘파람을 불며 다시 온 봄을 만끽했다. 매년 가을 새우축제 때면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남당리도 대하 철이 지나서인지 한가로운 갯마을로 변신해 있다.

봄기운 만끽한 홍성 해안도로…추억의 뽑기 대결도

남당리 어귀에서 추억의 뽑기 할아버지를 만났다. 작은 구리 국자에 설탕을 녹이고 소다를 넣어 부풀린 뒤 납작하게 눌러 금속 틀로 문양을 찍는데 부러뜨리지 않고 그 문양대로 떼어내면 하나를 더 주는 바로 그 뽑기.

어린 시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듯 심혈을 기울여 뽑기를 해본 경험이 있는 세대인 우리는 뽑기 할아버지의 파라솔 앞에 마법에 걸린 것처럼 자전거를 세웠다.

2인1조로 팀을 짠 뒤 뽑기 내기가 벌어졌다. 가장 늦게 완성하거나, 혹은 실패한 팀이 벌칙으로 굴구이와 맥주를 사기로 했으므로 살짝 피 튀기는 경쟁심리가 작동해 흥미진진한 대결이 예상됐으나 승부는 너무나 싱겁게 결정 나 버렸다.

평소 ‘내가 XX해봐서 아는데…’라며 무슨 일에든 꽤 나서기 좋아하는 홍석민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제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뽑기 선수였거든요”라며 호기롭게 과자를 받아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첫 손질에 ‘뚝’ 하고 부러뜨려버린 것.

팽팽한 긴장 속에 하트 형태의 문양을 손톱으로 살금살금 떼어내고 있던 허 화백이 폭소를 터뜨리며 배꼽을 잡았다.

홍석민의 불행은 경쟁자들에게 뜻밖에 손쉬운 부전승을 안겼고, 승리의 보너스로 공짜 굴구이에 맥주를 점심으로 확보한 팀원들은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7km 거리에 있는 천북을 향해 내달렸다.

1. 남당리에서 만난 추억의 뽑기 할아버지. 점심 내기 뽑기시합에서 홍석민이 일찌감치 실패하자 대원들이 아이처럼 폭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하고 있다.2. 수많은 소와 돼지의 살처분을 불러왔던 구제역은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다행히도 추가 발병 보고가 없는 상태지만 축산농가가 많은 홍성군은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곳곳에 방역초소를 운영하고 있다. 전국을 떠도는 우리의 자전거 바퀴를 통해 행여 가축병을 옮길까 염려되어 일부러 소독액이 분사되는 방역선을 통과했다.3. 여행에는 크고 작은 난관이 있게 마련이다. 추위가 물러가고 마침내 봄이 왔으나 불청객 황사도 함께 찾아왔다.먼지를 막기 위해 스카프로 임시 마스크를 만들었다.
1. 남당리에서 만난 추억의 뽑기 할아버지. 점심 내기 뽑기시합에서 홍석민이 일찌감치 실패하자 대원들이 아이처럼 폭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하고 있다.

2. 수많은 소와 돼지의 살처분을 불러왔던 구제역은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다행히도 추가 발병 보고가 없는 상태지만 축산농가가 많은 홍성군은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곳곳에 방역초소를 운영하고 있다. 전국을 떠도는 우리의 자전거 바퀴를 통해 행여 가축병을 옮길까 염려되어 일부러 소독액이 분사되는 방역선을 통과했다.

3. 여행에는 크고 작은 난관이 있게 마련이다. 추위가 물러가고 마침내 봄이 왔으나 불청객 황사도 함께 찾아왔다.먼지를 막기 위해 스카프로 임시 마스크를 만들었다.

침 살살 발라 똑! 똑! 허화백은 뽑기의 왕!

봄햇살 머금은 바다, 비늘처럼 반짝
곱게 뻗은 해안도로 위 휘파람 라이딩
추억의 뽑기 마주한 대원들
굴내기 한판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느새 봄산 삼켜버린 모래바람 속
코와 입 칭칭 동여매고 복면 라이딩
터질 듯한 폐, 아! 고지가 저긴데…


서쪽 하늘에서 비를 머금은 낮은 구름이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이내 누런 황사가 몰려온다. 조금 전까지 또렷하게 보이던 먼 산이 황사의 장막 속에 점점 희미해지자 자전거 나그네들은 저마다 스카프 등으로 임시 마스크를 만들어 코와 입을 칭칭 동여맸다.

가속 페달만 밟으면 달리는 자동차와는 달리 자전거는 온전히 자신의 심장과 폐, 그리고 근육으로 달리므로 호흡이 가쁠 수밖에 없다. 이런 황사 속에서 마스크 없이 달리면 엄청난 양의 먼지를 몸속에 집어넣게 되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등반을 앞둔 등반가들이 고산의 희박한 산소에 대비해 폐활량을 키우려고 일부러 몇 겹의 마스크를 착용하고 달리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보통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고 한다.

황사를 막기 위해 복면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흡입 공기량이 적어지자 숨이 가빠져 자전거의 속도는 8km/h 이하로 줄어들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폐가 터질 듯하다. 지척의 천북이 멀고도 멀게 느껴졌다.

짭조름한 굴의 육즙과 시원한 맥주 환상의 궁합

홍성군 은하면에서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하천의 하구에 자리 잡은 천북은 대한민국 굴구이의 본산이다. 국내에서 상업적 굴구이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으로 굴구이 단지라고 이름을 붙여놓았을 만큼 해안을 따라 굴구이집이 즐비하다.

식탁에 앉으면 굴과 함께 뜨거운 굴을 집어 먹는 데 쓰는 작업용 장갑과 집게가 하나씩 주어진다. 장갑이 모두 왼손용만 있는 게 재미있어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오른손은 집게를 잡고 왼손으로 굴을 잡는 게 정석이기 때문이란다.

석쇠 위에 올린 굴은 2∼3분 만에 입을 벌리고 자글자글 끓는데 바다에서 갓 건져낸 것이어서 꽤 짭조름한 바닷물 간이 배어 굳이 다른 양념이 필요 없다.

굴은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현지에서는 다라이라고 부른다. 다라이는 일본어 たらい<다라이>)에 가득 담겨 나오는데 약 8∼10kg이 2만5000원으로 4∼5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큼 푸짐하다.

제대로 익은 굴은 육즙이 그대로 남은 채 껍질에서 관자부분을 쉽게 떼어낼 수 있는데 굴의 향기와 바닷물의 간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것보다 그냥 먹는 게 더 훌륭했다. 후후 불어야할 만큼 뜨겁고 짭짤한 굴구이에 시원한 맥주는 문자 그대로 금상첨화.

하지만 맛있는 굴구이도 문제는 있었다. 물론 아마추어들이 불 조절을 잘못한 결과지만 석쇠 위에서 직화로 열을 받은 굴 껍데기가 마치 폭탄처럼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한두 개 튀는 것을 맞으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폭음과 파편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심지어 2m 이상 떨어진 옆 테이블에서 폭발한 굴 껍데기가 날아드는 상황. 굴 껍데기 폭탄의 위력은 꽤 막강해서 뺨에 맞자 면도칼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난다.

뽑기 내기에 져 굴구이를 한턱 내게 된 홍은 “양반이 먹을 게 못된다”며 자리를 떴으나 나머지 대원들은 이미 굴구이의 맛에 반해버린 뒤였으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모두 언제 튈지 모르는 굴 껍데기에 석쇠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용접할 때 쓰는 보안 마스크가 있어야겠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허영만 화백만은 홀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정좌한 채 마치 도인처럼 태연히 굴을 까먹는다.

어느새 자전거 탈 때 쓰던 보안경과 헬멧으로 중무장을 한 덕분에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 식객(食客)의 내공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겠다.

모두 자전거 헬멧과 보안경을 갖고 있었지만 허영만 화백 외에는 그걸 이용해 굴 껍데기를 막을 생각을 못했으니 말이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사진|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moto14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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