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림프종센터
2009년 다학제 협진 시스템 도입… 시행 14년 만에 진단 4000건 돌파
8개 과 의료진, 최적 치료법 제시… 설명 다 듣고 환자가 결정할 수도
난상토론 후 ‘치료 불필요’ 판단도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림프종센터 다학제 협진 현장. 환자(왼쪽)가 참석한 가운데 의료진이 치료법을 제안하고 결정한다. 림프종센터는 올 9월 기준으로 4160여 건의 다학제 협진을 시행했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에는 다른 대학병원(3차 병원)을 거쳐 온 환자가 꽤 많다. 이 때문에 ‘혈액암 4차 병원’이라고도 부른다. 여러 강점이 있기 때문인데, 특히 두드러진 것이 다학제 협진이다.
다학제 협진은 여러 진료과 의사가 모여 환자 치료법을 논의하는 시스템이다.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림프종센터는 다학제 협진 분야 선두에 서 있다. 림프종센터는 2009년 다학제 협진을 도입했다. 14년 만인 2023년 11월 협진 4000건을 돌파했다. 지난달 기준 4160건으로 늘었다. 국내 최다 기록이다. 이 시스템을 도입한 주역이자, 지금도 림프종 다학제 협진팀을 이끄는 조석구 혈액내과 교수에게 장점을 물었다. 조 교수는 “림프종의 질병 특성상 다학제 협진은 꼭 필요하다. 진료 정밀도와 환자 만족도를 모두 높이는 최적의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 림프종 다학제 협진 꼭 필요
림프종은 혈액암의 일종으로,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림프계에 발생한다. 크게 호지킨 림프종과 비(非)호지킨 림프종으로 나뉜다. 호지킨은 가장 먼저 림프종을 발견한 영국인 의사 이름이다. 호지킨 림프종보다는 비호지킨 림프종에서 악성이 많다. 국내 림프종 환자 95%는 비호지킨 림프종을 앓고 있다.
생존율을 높이려면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 우선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 부위에 혹이 만져지는지 확인한다. 종양이라면 대체로 크기 2cm 이상이며 눌렀을 때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고무공보다는 딱딱하지만 호두알보다는 딱딱하지 않다. 혹에서 열이 감지되지도 않는다.
체중 변화도 살펴야 한다. 림프종이 많이 진행됐다면 보통 6개월 사이에 체중의 10% 이상이 빠진다. 잠을 잘 때 땀을 많이 흘리는 경향도 강해진다. 이불이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면 병의 악화를 의심해야 한다.
조석구 서울성모병원 림프종센터 다학제 협진팀장은 다학제 협진이 진료 정밀도와 환자 만족도 모두를 높이는 치료법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성모병원 제공다만 림프조직이 전신에 퍼져 있어 어느 부위든 종양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조 교수는 “몸 깊숙한 곳 림프조직에서 림프종이 발생하면 알아차릴 방법이 없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 것 외에는 뾰족한 해법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 건강검진에서 특정 질병을 발견해 치료하러 갔다가 림프종을 발견하는 사례가 많다. 가령 소화불량 증세가 심해 소화기내과에 갔다가 위장에서 림프종을 발견하거나, 고환 이상이 의심돼 비뇨기과에 갔다가 해당 부위에서 림프종을 발견하는 식이다. 빈혈 치료를 하러 갔다가 골수에 림프종이 침범한 사실을 알게 되는 환자도 많다.
림프종은 항암이나 방사선 치료 외에도 세포 치료, 조혈모세포 이식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치료한다. 다만 세부 유형만 60여 종이어서 각각의 병리학적 판단에 따라 치료법이 달라진다. 조 교수는 “환자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치료 효과도 높다. 림프종 치료에서 다학제 협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 다학제 협진 어떻게 하나
림프종센터에서는 다학제 협진에 환자가 참여한다. 다학제 협진 현장은 토론장을 방불케 한다. 사전에 준비된 원고나 시나리오는 없다. 미리 치료법을 정하지도 않는다. 의료진은 각자 최선의 치료법을 내놓는다. 의견이 엇갈리면 여러 개 옵션이 나올 수도 있다. 환자는 언제든지 궁금한 점을 질문할 수 있고, 의사들이 내놓은 옵션에서 치료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조 교수는 “14년째 이런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 30대 여성 A 씨가 눈꺼풀 안쪽에 림프종이 발생해 병원을 찾았다. 이 경우 방사선 치료가 보통 시행된다. 하지만 백내장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안과 교수가 포함된 협진팀은 환자 상태를 고려해 6개월 혹은 1년마다 추적 관찰하자고 제안했다. 병의 진행 속도가 빠르지 않고 환자 불편도 크지 않으니 굳이 급하게 치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사실상 ‘치료 보류’인 셈인데, A 씨는 충분히 설명을 듣고 나서 기꺼이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조 교수는 “치료하지 말자고 결정하는 것도 치료의 일환이다. 다학제 협진이 아니라면 이런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혈액병원 림프종센터장을 맡고 있는 민기준 혈액내과 교수도 “다학제 협진은 각 분야 전문가가 상의하고 환자도 참여해 치료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에 진짜 맞춤형 진료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학제 협진은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낮 12시까지 진행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과 의정 갈등 사태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열었다. 보통 한 환자당 20분 정도 소요된다. 다학제 협진팀에는 △혈액내과(조석구 민기준 교수) △소화기내과(강동훈 교수) △호흡기내과(이진국 교수) △안과(양석우 박정열 교수) △방사선종양학과(최병옥 최규혜 교수) △병리과(박경신 김수연 교수) △영상의학과(최준일 교수) △핵의학과(오주현 교수) △전문간호사(이정연) 등이 참여하고 있다.
● 삶의 질 높이는 치료법 모색
70대 후반의 B 씨는 몇 달 전 지방의 한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위암이 발견돼 내시경으로 종양이 있는 부위만 일부 절제하는 시술을 시행했다. 얼마 후 의사는 암이 깊은 부위까지 침투했다며 위 전체를 들어내는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B 씨는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 추가 검사를 받았다. 이때 위에서 림프종이 발견됐다. 의료진은 위암과 림프종 모두를 치료하려면 위 전체를 들어내는 게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다학제 협진에서 결과가 바뀌었다. 암의 전이가 없는 데다 위암과 림프종 사이를 부분 절제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판단이 나온 것.
위 부분 절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암은 전이되지 않았다. 다만 림프종은 남아 있었다. 다학제 협진팀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헬리코박터 치료부터 시행했다. 조 교수는 “헬리코박터를 죽이면 림프종도 50∼80% 줄어든다. 따라서 헬리코박터 치료부터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B 씨는 위 림프종에 대한 추적 관찰을 받고 있다. 헬리코박터 치료가 끝나고도 위 림프종에 변화가 없다면 방사선 치료를 시행할 예정이다.
위를 완전히 들어내느냐, 부분 절제하느냐는 이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결정이다. 무엇보다 삶의 질이 확 달라진다. 만약 다학제 협진을 시행하지 않았다면 B 씨는 외과 판단에 따라 위를 완전히 들어내는 수술을 시행했을 확률이 높다. 당시 B 씨는 부분 절제술 결정에 대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며 크게 반겼다고 한다.
● 오진 막는 데도 기여
림프종 다학제 협진은 불필요한 진료나 오진 위험을 줄이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30대 남성 C 씨의 경우 다학제 협진 덕분에 불필요한 추가 항암치료를 받지 않아도 됐다. C 씨는 다른 병원에서 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은 후 서울성모병원을 찾았다. 림프종 다학제 협진팀이 C 씨 진료를 맡았다.
림프종의 전이를 비롯해 환자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추가 검사를 시행했다. 폐의 실질 부위에서 종양처럼 보이는 게 발견됐다. 폐암이나 폐 림프종으로 의심되는 상황. 하지만 협진팀은 단정하지 않고, 추가 조직검사를 했다. 그 결과 ‘이상 부위’는 폐결핵으로 판명이 났다. C 씨는 결핵 치료에 이어 호지킨 림프종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현재 C 씨는 종양이 발견되지 않는 ‘관해(寬解)’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C 씨 다학제 협진은 두 차례 진행됐다. 협진팀은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면밀하게 검토했다. 그 결과 정확한 병명을 진단했고, 덕분에 C 씨는 불필요한 치료를 받지 않고 병원을 일찍 나올 수 있게 됐다.
다학제 협진을 통해 오진을 바로잡은 사례도 있다. 50대 남성 D 씨가 그랬다. D 씨는 3년 전 다른 병원에서 십이지장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방사선 치료를 했지만 얼마 후 재발했고 결국 서울성모병원에 왔다.
림프종 다학제 협진팀이 살펴보니 진단 과정에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협진팀은 십이지장과 위장 사이 소장에도 림프종이 있을 거로 의심했다. 이 부위는 일반 내시경 검사로는 확인이 어렵다. 협진팀은 캡슐 내시경 검사를 진행했고, 소장에 침투한 림프종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D 씨는 십이지장 림프종이 재발한 게 아니었다. 소장 림프종의 존재 사실을 의료진이 몰랐던 것이다.
원인을 찾아냈으니 치료 과정은 수월했다. 조 교수는 “다른 병원의 오진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병리적 판단이 다소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점을 환자에게 충분히 설명했고, 처음엔 화가 났던 환자도 나중에는 어느 정도 수긍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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