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했더니 네이처 논문 저자가 됐다… 게임 집단지성의 놀라운 결과[조영준의 게임 인더스트리]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5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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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라는 단어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전에서는 ‘규칙을 정해 놓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로 표기하고 있지만, 원시 시대부터 현대 사회까지, 나아가 PC나 스마트폰, 유비쿼터스, 메타버스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환경에 따라 게임의 정의도 바뀌곤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제반 환경 요소를 베재하고, 핵심이 되는 ‘게임적 요소’만 살펴본다면 어떨까요? 왜 사람들이 그토록 게임에 매력을 느끼는지, 그리고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 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잡지 ‘네이처’ / 출처=네이처 홈페이지
세계적인 과학잡지 ‘네이처’ / 출처=네이처 홈페이지
이러한 ‘게임적 요소’의 힘을 증명한 대표 사례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잡지 ‘네이처’에 수만 명의 게이머가 저자로 기록된 이색적인 사례입니다.

‘단량체 프로테아제’라는 단백질 분해 효소가 있습니다. 이 효소는 에이즈와 암 등 각종 난치병 치료의 열쇠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효소를 자세히 알아낸다면 각종 난치병 치료도 시간 문제라고 평가를 받았으나, 아무리 최신 기술을 동원해도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최첨단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단백질 구조는커녕, 뭉개진 스파게티 같은 1차원적 모양만 보여서 알 수가 없었고, 컴퓨터로 3차원 구조를 시뮬레이션하려 해도 단백질 종류만 10만 개가 넘는 상황이라 10년 넘게 문제 해결이 요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한 미국의 연구진이 독특한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사람들의 직감에 기대어 보면 어떨까?’라고요. 사람들에게 단백질 구성 원리를 알려주고, 그들이 만든 가상의 단백질 구조를 모아 프로테아제 효소 구조를 더듬어 보자는 아이디어였는데, 이 의견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람들이 뭐가 좋다고 그런 노동을 하나’, ‘과연 몇 명이나 이 프로젝트를 도와줄까’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연구진은 충분히 도전해볼만 하다는 입장이었는데요. 구조를 풀어내는 과정 자체가 ‘게임처럼 재미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면 문제 해결이 가능하리라 본 것입니다.

’폴드 잇’ 게임 화면 / 출처: 폴드 잇 공식 홈페이지
그렇게 해서 탄생한 퍼즐 게임이 바로 ‘폴드 잇’(fold it) 입니다. 이 게임은 실제 단백질 구성 원리에 따라 아미노산 사슬을 배열하고 뒤틀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고, 사람들이 퍼즐을 풀 듯 규칙에 맞게 이어 나가도록 개발됐습니다. 보상이라고는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 때 마다 높아지는 점수와 이 점수를 다른 이들과 겨룰 수 있는 점수판이 전부였습니다.

단순해 보이는 게임이었지만, 결과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폴드 잇을 설치한 전 세계 게이머들은 단 3주만에 프로테아제 효소 구조를 파헤쳤습니다. 이 놀라운 결과는 2011년 9월 네이처 지에 새로운 논문으로 발표됐는데요. ‘온라인 게임을 통한 단백질 구조 예측’이라는 이름으로. 폴드 잇 게이머 5만 7000여 명도 공저로 기록됐습니다.

’아이와이어’ / 출처=아이와이어 공식 블로그
’아이와이어’ / 출처=아이와이어 공식 블로그
이러한 폴드 잇의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프로젝트가 추가 진행됐습니다. 2014년에 신경 지도를 그리는 퍼즐 게임 ‘아이와이어’가 출시됐는데요. 이 게임에도 수많은 전 세계 게이머들이 모여들었고, 출시 2년 만에 망막 신경세포 95개의 구조가 밝혀졌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난 2016년에는 유명 SF 샌드박스 게임인 ‘이브 온라인’에 인간 세포를 비교하고 분석하는 미니 게임이 추가됐는데, 이를 통해 공개 하루 만에 약 40만 개의 인간 세포 데이터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게임적 요소를 활용한 강력한 힘이 증명된 사례이며, 게임적 요소에 반응한 집단 지성이 세계를 선도하는 학자들을 능가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게임적 재미가 사람들에게 주는 힘이 크다는 반증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게임적 요소를 좀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순 없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당연히 가능’합니다. 실제로 이 같은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또 활용되고 있습니다. 게임적 요소를 넣은 콘텐츠를 ‘기능성 게임’이라고 합니다.

’캐치잇 잉글리시’ / 출처=NXC
’캐치잇 잉글리시’ / 출처=NXC
일례로, 넥슨의 지주회사인 NXC가 ‘캐치잇 잉글리시’(Catch It English)는 퀘스트, 랭킹 등 기존 게임의 시스템을 차용한 것이 특징인 영어학습 앱입니다.

기능성 게임으로는 독보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학습 앱인데, 네이버 앱스토어 전체 1위를 한 바 있으며, 구글 플레이 신규 교육용 앱 1위와 애플 앱스토어 교육 카테고리 무료 앱 2위를 차지했습니다. 현재 이용자만 200만 명이 넘습니다. 게임처럼 즐기는데도 영어 교육 효과가 높아 널리 추천되고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손쉽게 배울 수 있다며 호평 일색입니다.

’리 미션 게임’ 스크린샷 / 출처=리 미션 공식 홈페이지
’리 미션 게임’ 스크린샷 / 출처=리 미션 공식 홈페이지
미국의 비영리 소아암 연구단체인 호프랩이 개발한 ‘리 미션’ (Re-mission)이라는 기능성 게임도 있습니다. 이 서비스는 질병 정보, 예방법 등을 알게 해 몸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임 형태로 개발됐습니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질병 정보도 얻고, 암세포들을 무찌르며 스트레스도 풀 수 있어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게임적 요소를 활용한 예는 이들 외에도 대단히 많습니다. 과거에는 단순한 ‘아이들 놀이’에 불과했던 게임이 다양한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직은 먼 이야기 같지만, 가상현실과 메타버스 기술이 본격적으로 일상에 개입된다면 게임적 요소의 많은 순기능이 훨씬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조영준 게임동아 기자 june@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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