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우리 테러범 아니에요”

  • 동아닷컴
  • 입력 2010년 1월 11일 03시 00분


1년에 두 번 ‘해부 실습’ 갖는 척추전문 ‘21세기병원’…전문의도 재교육 통해 고도의 수술 테크닉 훈련

한 백정이 손을 벌벌 떨며 시신을 가른 뒤 몸속에서 장기를 꺼낸다. 뒤에 앉은 양반은 장기가 그려진 책과 시신에서 꺼낸 장기를 비교하며 유심히 살핀다.

4일 첫 방영된 SBS 드라마 ‘제중원’의 시신 해부 장면이다.

오래전부터 인체는 탐구의 대상이었다. ‘현대 해부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매우 사실적이고 정밀한 시신 해부도 1750여 장을 그렸다. 다양한 연령의 남성과 여성의 시신 30여 구를 해부해 얻은 결과다.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은 스승 유의태의 시신을 해부해 ‘신형장부도’라는 인체도를 그렸다. 신형장부도의 정확하고 섬세한 묘사는 현대의 인체도에 견줘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시신 해부실습은 인체를 더욱 면밀히 알게 해주는 의학의 핵심이다.

○ 배움의 열정으로 시신과 보낸 24시간

2009년 12월 4일 오후. 진료를 끝내고 회진을 마친 의사 4명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큰 가방을 들고 여권도 준비했다. 종일 계속된 수술과 상담으로 피곤할 텐데도 표정에 기대감이 서려 있다.

준비를 마친 의사들은 곧장 인천국제공항으로 달려갔다. 3시간 뒤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그들은 야경을 즐길 틈도 없이 호텔로 가 잠을 청했다.

이튿날 그들은 중국 3대 의과대학으로 꼽히는 푸단대 부속 화산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도착한 그들이 간 곳은 포르말린 냄새가 진동하는 해부 실습실. 수술대에는 40대 남성으로 보이는 해부용 시신이 누워 있었다.

의사들은 곧 가방에서 의료용 드릴, 나사못 등 도구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목부터 꼬리뼈까지 연결된 척추를 찾았다. 뇌에서 뻗어 나온 신경과 척추를 둘러싼 근육 하나하나를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졌다. 평소 환자를 수술하면서 생겼던 의문도 해결했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하루 12시간씩 이틀을 꼬박 시신과 함께 보냈다. 월요일에 한국에 도착한 이들에게는 또다시 빡빡한 수술과 진료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 끊임없는 훈련과 연구는 의사의 숙명이다

척추전문 21세기병원은 2004년부터 1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해외 해부실습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까지는 호주 시드니에서, 2007년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진행하고 있다. 21세기병원의 해부실습은 실제 척추수술을 위해 외과의사로서 정교한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목적이다.

일부 해외병원의 해부실습실은 국내보다 여건이 좋은 편이다. 영상증폭장치(C-Arm)를 갖춘 병원에서는 수술이 이뤄진 부위를 화면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시신을 구하는 것도 국내보다 쉬운 편이다. 국내에서는 해부실습에 기증되는 시신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실습실의 장비도 다소 열악하다.

해외에서 해부실습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항공료 등 기본 경비를 제외하고 실습에만 들어가는 비용이 1인당 최소 200만 원이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해외실습을 진행하는 이유는 ‘수술 후 환자의 부작용과 후유증이 없는 병원’을 목표로 하는 이념 때문이다.

성경훈 21세기병원 대표원장은 “해외 해부실습 일정이 매우 빡빡해 의사들에게는 거의 지옥훈련이나 다름없다”면서 “환자에 대한 애정과 의학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끊임없는 훈련과 연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의 숙명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 완벽한 수술의 왕도는 연습뿐!

21세기병원은 신경외과 전문의를 척추분야 전문의로 재교육하는 병원으로 유명하다. 이 병원에서는 대학에서 신경외과 전문의 자격을 딴 후에도 2년의 전임 기간을 거쳐야 한다. 이때 척추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다. 이후 1년 동안 검증기간을 거쳐야 환자수술을 직접 수술할 수 있다.

의대 공부 6년과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을 거쳐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더라도 척추수술경험이 적은 의사가 적지 않다. 척추에는 세밀한 신경이 밀집돼 작은 실수로도 수술 후 심각한 후유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해부실습은 수술 경험이 적은 의사들에게 수술과 같은 경험을 쌓게 하는 ‘특별훈련’인 셈이다.

해부실습 때는 전임의가 직접 환자를 수술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해부한다. 평소 익숙지 않은 수술법을 제대로 연습할 기회이며 수술 감각과 노하우를 터득하는 시간이다. 시신의 배와 등 쪽을 가르면 척추를 둘러싼 미세한 신경과 혈관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주변 조직의 변화, 수술 후 상태까지 사진이나 모니터가 아닌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뼈를 깎고 시신을 고정시키면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간 신경가지도 볼 수 있다. 신경이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디스크를 제거해야 신경을 손상시키지 않고 치료할 수 있는지도 현장에서 얻는 실전 지식이다. 최근에는 대부분 내시경이나 현미경을 사용해 수술하기 때문에 육안으로 신체 부위를 보는 데 한계가 있다. 정확한 수술을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부위까지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해부실습은 이런 변화까지 알 수 있는 기회다.

○ 해부실습 도구로 테러범 오해 받기도

6년간 해외 해부실습을 다니면서 겪은 에피소드도 많다. 의료용 드릴과 나사못 등 해외병원에서 제공하지 않는 수술도구를 들고 갔다가 공항 검색대에서 테러범으로 오해받은 적도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본인이 의사이며 각종 장비가 의료기구임을 증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한번은 21세기병원 의료팀이 척추 부위만 해부하는 것을 안 외국 대학병원 측에서 목과 팔, 다리가 없는 시신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물다는 바로 전날 사망한 시신을 만나는 ‘행운’도 겪었다. 사망하고 시간이 지난 시신은 냉동기간이 길기 때문에 조직과 신경이 다소 딱딱해진다.

2004년 전임의 당시 해부실습을 했던 이규석 의무원장은 “해부실습을 통해 실제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능숙하게 수술하는 노하우를 얻었다”면서 “이런 교육 시스템이 21세기병원뿐 아니라 다른 병원에도 보편화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봉아름 기자 er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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