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 의사, X선으로 예술을 찍다…영상의학전문의 정태섭 교수

  • 입력 2007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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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의사’가 만든 ‘X선 작품’이 호평을 받고 있다. ‘X선 작품’이란 영상 의료장비로 찍은 사진물이다.

영동세브란스 영상의학과 정태섭(53·사진) 교수는 서울 종로구 내수동 갤러리 정에서 열리고 있는 ‘상상전(展)’에 초청을 받아 ‘청포도’ ‘입 속의 검은 잎’ ‘오-매, 단풍 들것네’ ‘그 여자네 집’ ‘장미의 배반’ 등 작품 5점을 출품했다. X선 영상을 이용한 미술작품 전시회는 국내에서도 드문 일이다. 이 전시회에는 한국화가 한풍렬 이민주 이도선, 서양화가 이선원 유숙자 장지원 씨 등 이름이 알려진 작가 14명이 초대받았다.

정 교수는 한국인의 사랑을 받아 온 시인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시상을 형상화하는 데 힘썼다. 그는 요절한 젊은 시인 기형도의 시와 제목이 같은 ‘입 속의 검은 잎’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든다.

그는 “아내의 장미꽃 브로치를 보는 순간 기형도 시인의 ‘입 속에 똬리를 튼 채 생을 위협하는 검은 잎’이란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면서 “X선을 통해 텁텁한 가래처럼 죽음과 굴복, 타협 등의 그림자들이 입 속에 검은 잎으로 악착같이 매달려 있다던 시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후배 의사에게 입에 브로치를 물게 한 뒤 이 작품을 촬영했다.

정 교수는 ‘청포도’와 ‘장미의 배반’을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엑스포 2007, 뉴욕’이란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번 달에 열리는 이 전시회는 미술계의 엑스포로 불리며 팝아트 계열 작품들을 주로 선보인다.

대부분 미술 작품은 빛이 물체에서 반사되는 감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X선 영상은 물체를 투과해 안에 있는 밀도와 질감으로 표현한다. 외국에선 판화가들이 가끔 이런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객들은 정 교수의 작품 앞에 한참 머물다 발길을 옮기고 있다.

이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 서양화가 이선원(수원대 조형예술과 교수) 씨는 “우리 주위의 자연물을 X선을 이용해 생명체로 잘 표현한 작품”이라면서 “영상이나 사진 작업을 하는 분의 작품으로 생각했는데 의사인 줄 알고 깜작 놀랐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과학의 이성과 예술의 감성이 접목되면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1995년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 장치(MRI), X선 등 영상 장비를 한 달에 한 번씩 시험 촬영하면서 ‘인체 대신 사물을 써 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후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자녀의 성장 모습을 일반 사진이 아닌 X선 사진으로 찍어 보관할 정도로 유별난 정 교수는 ‘X선을 쪼인 골프공이 더 멀리 날아간다’, ‘X선을 쪼인 저가 와인은 고급 와인처럼 맛이 부드러워진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과 실험을 해서 널리 알려져 있다.

2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은 점당 40장 안팎의 한정판으로 인화돼 30만∼70만 원에 팔리게 된다. 그는 출품작을 모두 병원에 기증하고 조만간 개인전을 열 생각이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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