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희 할머니의 '도전!게임왕'④]노총각의 풋사랑

  • 입력 2002년 8월 11일 17시 57분


눈 앞에 ‘아길레라’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하는 온라인 게임 ‘레드문’(www.redmoon.co.kr)에서 아길레라는 가장 힘이 세고 나쁜 몬스터입니다. 그래서 게임을 하는 사람 여럿이 힘을 합쳐야만 물리칠 수 있는 상대이지요.

“잡아라!”

“돌격 앞으로!”

한국 어딘가에 앉아 ‘라비타’ ‘박진희’ ‘사다드’ 등 다양한 캐릭터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저마다 채팅창에 호전적인 문구를 입력하며 몬스터를 때려잡기 위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커다란 함성이 들리는 듯 했어요.

그런데, 어? 저쪽 한 구석에 머리가 길고 키가 큰 멋진 모습의 ‘사다드’가 아무 움직임 없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ID를 보니 ‘필라르’(가명)였어요. 저랑 친하게 지내는 31세의 남자였지요. 물론 얼굴은 모릅니다. 채팅으로 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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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르, 왜 축 처졌어?”

“할머니, 저 애인 생겼어요.ㅠ.ㅠ(엉엉 우는 모습)”

“그래? 좋∼겠네∼, 올 해 장가가려나? 근데 왜 울어?”

“여자 나이가 좀 많아요.”

“요즘 남자보다 여자 나이 많은 게 흠인가? 젊은 사람이 왜 그래?”

“저보다 16살 많구요, 아들이 고등학생이에요.”

“허걱….”

저도 몬스터 때려 잡기를 멈추고 그만 그 자리에 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필라르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마침 놀러 와 있던 친구의 친척인 ‘여자친구’와 자연스럽게 ‘누나’ ‘동생’ 하며 지내다 친해졌나 봅니다.

“안돼. 끝내. 필라르 맴(마음)도 알겠지만, 자식있는 가정을 망치면 안돼. 그 노무 여편네는 지 서방 냅두고 왜 참한 총각을 건드린댜?”

필라르는 그 뒤로 한 동안 그 여자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여자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해서 둘 관계가 끝났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제가 그 사람 생일이었어요. 저도 모르게 집앞까지 가서 서성이다 왔어요.”

“많이 힘들지? 토닥토닥….”

“아녜요, 할머니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 사람도 후회하고 있을 거에요.”

얼굴을 보지 않고 캐릭터로 만났기 때문에 필라르가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을 것도 같네요. 몬스터 앞에 가만히 서 있을 때 필라르의 캐릭터가 그렇게 안쓰러워 보이더니, 요즘은 깡총 깡총 뛰어 다니는 게 좀 힘이 나나 봅니다.

“할머니, 저 앤 생겼어요∼ ^^;”하고 필라르가 웃을 날을 기다려 봅니다.

△캐릭터〓게임을 하는 사람이 게임을 하기 위해 고르는 주인공. 사람을 대신해 대화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게임 내에서는 또 다른 자아(自我)로 인식된다.

shyang45@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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