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인간 게놈프로젝트' 발표후 '게놈 철학 '논의 잇따라

  • 입력 2000년 7월 3일 19시 08분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이 발달하고, 특히 최근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결과가 속속 발표되면서 인간의 개념을 비롯해 지식 주체 자아 역사 과거 과학 윤리 등 일련의 개념 전반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게놈철학(Genophilosophy)’이라는 분야가 새로 등장하고, 26일 인간게놈프로젝트의 발표 직후에는 세계 학계가 온통 게놈연구가 가져 올 윤리적 문제와 인간의 정체성 등에 관한 논의로 분주하다.

미국 앨러배머대 면역학 및 류머티스학 연구소 로버트 킴벌리소장이 말하듯이 게놈연구가 고용이나 보험 등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논의가 돼 버렸다. 이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철학적 사유의 마지막 근거였던 ‘주체’마저 더 이상 기능하기 어렵게 됐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던 전통적인 주체(Subject), 즉 철학적 역사적 또는 사회적 의미의 주체가 대단히 불확실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헝가리 페츠대 자너스 보로스교수는 역사상 인간이 추구해 온 것이 자유의 신장이라고 할 때 이제는 단순히 자유의 문제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의 자유인가 개인의 자유인가, 아니면 게놈의 자유인가를 구분해 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공지능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 터프츠대 인식연구센터 대니얼 C 데닛소장은 인간에 비해 게놈이 더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이나 세포 뿐만 아니라 게놈도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생존과 진화를 위해 ‘의도적인’ 선택을 한다. 그런데 실제로 이 때의 선택은 게놈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우리 인간은 오히려 자신들의 게놈에 의해 행동이나 지식에 많은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다.

로스교수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이런 관계를 인식하든 못하든 인간의 자유는 게놈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방사선이나 생태계 오염 등의 환경적 영향 속에서 게놈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염기서열을 변경하고 이에 따라 규정된 인간이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화도 게놈의 의도적인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역사도 만들어진다는 주장이다. 또한 게놈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간 자체의 진화과정과 역사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이렇게 본다면 게놈연구는 주체의 근거, 인간과 사회의 관계, 역사의 원동력 등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게놈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980년대 말부터 생물공학과 유전공학이 발달하면서 역사학이나 사회학이 생물공학과 유전공학으로 대치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전위적인 철학자들은 더 이상 사회, 언어, 지식, 물리적 세계 등의 문제를 탐구하는 대신 모든 ‘전통적’ 문제들의 유전적 구조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Philosophy News Service(www.philosophynews.com)’ ‘Hippias(hippias.evansville.edu)’ ‘noesis(noesis.evansville.edu)’ 등 철학 관련 사이트에서는 철학자 뿐 아니라 전세계 인문사회과학자 및 자연과학자들까지 참여하여 인간게놈과 관련된 논의가 활기차게 진행되고 있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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