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80>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10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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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범증은 그길로 패왕을 찾아갔다. 아직도 어지러운 심사를 바로하지 못한 패왕은 이번에도 범증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범증은 전처럼 곱게 물러나지 않았다. 패왕의 군막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외쳤다.

“범증이 대왕께 간곡히 청합니다. 이 늙은 것의 뼈를 돌려주소서(願賜骸骨)!”

그런 범증의 외침을 듣자 패왕도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범증을 군막 안으로 들이게 한 뒤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아부, 한밤중에 이 무슨 소란이오? 뼈를 내달라니, 갑자기 그 무슨 말씀이오?”

“천하의 일은 대강 형세가 정해졌으니, 이제부터는 대왕께서 홀로 해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늙은 것을 이만 놓아주시어 고향땅에 뼈를 묻게 해 주십시오!”

범증은 길게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그렇게 바로 속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 함께 목숨을 건 싸움터를 내달으며 쌓인 애증(愛憎) 때문인지 절로 목소리가 떨리고 콧등이 시큰해왔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겪기는 패왕도 마찬가지였다. 패왕은 범증이 찾아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배신감에 떨며 범증을 어떻게 처결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범증이 먼저 찾아와 떠나려 하니 가슴이 철렁하며 난데없는 미련으로 다급해졌다.

“아직 교활한 도적이 살아있고 큰 싸움이 남았는데, 무슨 형세가 정해졌다는 거요? 그리고 아부는 왜 이 밤에 갑자기 떠나야 하오?”

패왕이 그러면서 어물어물 범증을 말려보려 했다. 하지만 범증의 마음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굳어진 뒤였다. 한 병가(兵家)로서는 속임수와 거짓도 마다않는 그였으나, 인정과 의리를 주고받는 데는 여리고 섬세하다 할 만큼 개결한 데가 있었다. 그런데 패왕의 불신이 그 개결함을 여지없이 짓밟아, 한시도 그 곁에 머물고 싶지 않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패왕도 난데없는 미련에 어물거리며 범증을 잡는 척하고는 있으나, 마음속의 의심이 다 풀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을 잘 믿지 못하는 천성에다 사자가 형양성 안에서 보고 들은 증거가 너무 뚜렷해, 범증을 말려도 건성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범증이 기어이 떠나기를 고집하자 오히려 자기 손으로 범증을 해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허락하고 말았다.

“알겠소, 아부. 정히 그러시다면 날이 밝는 대로 떠나시오.”

그리고 다음날 일찍 범증이 떠날 때는 제법 애틋한 작별까지 나누었다.

“그럼 잘 가시오, 아부. 고향에 돌아가 편히 쉬시며 길이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누리시오. 부디 강령하시오. 과인은 천하가 평정되는 대로 아부를 찾아 오늘 못다 푼 회포를 옛말삼아 풀어보겠소.”

그러나 떠나는 범증도, 보내는 항우도 자신들이 적의 이간책, 특히 진평의 독수에 걸려들어 그리 된 것이라고는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패왕과 작별한 범증은 곁에서 오래 자신을 시중들어온 이졸 하나만 데리고 팽성으로 떠났다. 그곳에 있는 가솔들을 거두어 고향인 거소(居4)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이제는 급할 것도 없어 느릿느릿 말을 몰며 늦은봄 길을 가다보니 온갖 감회가 가슴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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