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43>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4월 27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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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아니오. 그렇지 않소. 경포를 이대로 살려둔다면 앞으로는 어느 누구도 과인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오. 반드시 그놈의 고기로 젓을 담아 모든 제후들에게 돌려야 하오. 과인을 저버린 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온 천하에 보여주어야만 하오.”

패왕이 금세라도 터질 듯한 얼굴로 씩씩거리면서 그렇게 우겨댔다. 하지만 이번에는 범증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전에 없이 엄한 얼굴로 꾸짖듯 말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가슴과 배가 썩어 들어가는 큰 병을 버려두고 살갗에 난 버짐이나 부스럼만 그리 급하게 다스리려 하십니까? 이대로 갈팡질팡 하시다가는, 서초는 말할 것도 없고 대왕의 옥체조차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제야 패왕도 조금 분기를 가라앉히고 물었다.

“아부(亞父).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무엇이 가슴과 배의 큰 병이고, 무엇이 살갗에 난 부스럼과 버짐이란 말이오?”

“지금 한왕 유방은 파촉(巴蜀)과 한중(漢中)에다 삼진(三秦)을 아울러 부강했던 옛 진나라의 땅을 오롯이 하고 다시 함곡관을 나와 틈을 엿보고 있습니다. 광무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고 오창의 넉넉한 곡식을 먹으며 형양에 자리 잡아 성고와 기각지세(기角之勢)를 이루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왕의 가슴과 배에 생긴 큰 병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다 이번에 위(魏) 대(代) 조(趙) 연(燕)을 차례로 차지하여 동북으로부터 서초를 에워싸는 형국을 만들고, 다시 경포를 꾀어 대왕의 턱밑에 칼을 들이대게 하였으니, 실로 시급히 다스리지 않으면 가슴과 배에 내려앉을 큰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한신과 장이나 팽월, 경포의 무리는 유방이 시키는 대로 이리 뛰고 저리 닫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갑고 성가시기는 하지만 목숨을 노리지는 못하는 등에나 거머리 같은 무리요, 병으로 치면 살갗에 난 부스럼이나 버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포가 지나온 기현 상현이나 이제 향하고 있는 풍(豊) 패(沛)의 땅은 모두 우리 서초 한가운데 있어 우리와 팽성의 연결마저 끊고 있소. 그런데 그걸 버려두고 형양으로 가서 굳게 지키기만 하는 유방을 치란 말이오?”

“하지만 유방의 목을 베면 경포도 절로 머리 없는 귀신이 됩니다. 거기다가 당장도 경포를 치는 일이라면 용맹한 장수를 골라 군사 한 갈래를 떼어주는 것으로 넉넉합니다.”

그 말을 듣자 패왕도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기더니 아무래도 못미덥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경포는 장강(長江)의 수적으로 몸이 늙은 자요. 거기다가 지난 몇 년 과인을 따라다니면서 군사 부리는 법을 익혀 이제는 만만찮은 장재(將材)를 보여주고 있소. 과인이 직접 가지 않고도 경포를 잡을 만한 장수가 내게 있는지 모르겠소.”

“용저(龍且) 장군에게 군사 1만 명만 떼어주고 바로 구강(九江)을 치게 하십시오. 그리고 따로 팽성에 있는 항성(項聲·항백) 장군에게 2만 군사를 내어 용저 장군의 뒤를 받쳐주게 하시면 구강은 보름 안에 서초의 땅이 될 것입니다. 그 사이 대왕께서는 대군을 형양으로 집중하여 하루 빨리 유방을 사로잡고 천하대세를 결정지으셔야 합니다.”

범증이 그렇게 자신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얘기가 군사를 부리는 일로 돌아가자 패왕도 계책을 보탰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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