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박경미]지나친 선행학습, 역효과 부른다

  • 입력 2005년 1월 3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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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궁금한 것 중 하나는 과연 선행학습을 시켜야 하는지, 또 정말 효과가 있는지 하는 점이다. 수학 교과에 대한 선행학습은 점차 그 도를 더해 요즘 1∼2년 앞서 배우는 것은 선행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가 되고 있다.

국가 수준에서 교육과정을 만들고, 또 그 교육과정에 기초해 교과서를 집필할 때 학습자의 인지발달 수준이 중요하게 고려된다. 각 연령대의 학습자는 나름의 고유한 사고 양식을 가지고 있다. 원론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자신의 연령에 부합되는 내용을 제 학년에 학습하는 것이 적절하다.

선행학습을 하면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피상적으로만 알고 지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아이는 막상 제 학년에 그 내용을 접할 때에는 이미 아는 것으로 간주해 대충 넘어갈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에 어설프게 배우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나이에는 학습을 소홀히 하는 폐해가 나타날 수 있다.

영국의 수학교육학자 리처드 스켐프는 이해를 ‘관계적 이해’와 ‘도구적 이해’로 구분한 바 있다. 관계적 이해는 개념이나 원리의 이면에 있는 아이디어까지 이해하는 것을 말하며, 도구적 이해는 알고리즘이나 공식에 따라 답을 계산해 내기는 하지만 문제가 변형되면 풀지 못하는 불완전한 수준의 이해를 말한다. 선행학습에서 흔히 나타나는 지식의 섣부른 형식화 경향은 학습자를 관계적 이해보다는 도구적 이해에 머무르게 할 가능성이 높다.

서울 강남의 한 중학교 학생들이 다음 학기 과정을 미리 배웠느냐는 질문에 앞 다퉈 손을 들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주위를 둘러보면 초등학생이 중학 수학을 배우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수학을 비교해 보면 문제에 대한 접근법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문제마다 조건을 분석하고 여러 가지 문제해결 전략을 사용해 ‘산술적’으로 해결한다. 이에 비해 중학교에서는 방정식을 세우고 정형화된 절차를 따라 푸는 ‘대수적’ 경향이 강해진다. 대수적 방법은 일반화가 가능하다는 면에서 강력한 해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문제해결력의 신장이나 다양한 사고를 경험한다는 측면에서는 산술적 사고를 충분히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전쟁에 비유하면 산술적 방법은 칼만 가지고 싸우는 것에, 방정식을 동원하는 대수적 방법은 칼뿐 아니라 총까지 소지하고 싸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당장의 싸움에서는 총까지 동원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그렇지만 자연스러운 학습 속도를 따라 가도 중학생이 되면 대수적 방법, 즉 총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때는 누가 더 유리할까. 아마도 칼이라는 원시적인 무기로 버티면서 다양한 노하우를 축적한 경우가 유리할 것이다.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은 일찍이 강력한 총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잠시 우위에 서는 것 같지만, 남들도 동일한 무기를 갖게 되면 별 소용이 없어진다.

선행학습을 충분히 소화해 내고, 또 그런 지적 도전을 즐기는 학습자도 있다. 상위 학년의 내용을 일찍 가르치면 다소간의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쪽으로 마음이 끌리기 쉽다. 다른 집 아이가 선행학습을 해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어 내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엄마는 거의 없다. 하지만 과도한 선행학습은 대부분의 학습자에게 무리한 일이다. 좀 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제 나이에 적합한 내용을 충실히 배우는 ‘적기 교육’이 해답이다.

박경미 홍익대교수·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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