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①]「문민개혁」의 탄생

  • 입력 1997년 12월 31일 18시 40분


《32년만의 문민정권을 내세웠던 김영삼(金泳三)정부의 5년 전 출범은 ‘50년만의 여야 정권교체’라는 김대중(金大中)당선자의 화려한 출발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퇴임 2개월을 채 남겨놓지 않은 지금, 5년 전의 그 환호는 사라지고 나라는 ‘국가부도’에 이를 뻔한 지경으로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동아일보는 새해 지면쇄신과 함께 ‘김영삼정부 실종사(失踪史)’를 시리즈로 싣는다. ‘문민정부’라는 화려한 얼굴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곳곳의 비화(비話)를 추적해 오늘의 교훈으로 삼으려 한다.》

93년 2월25일 오후. 국회에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김영삼대통령은 마침내 청와대에 입성(入城)했다. 수석비서관들과 ‘칼국수 오찬’을 마친 김대통령은 조각(組閣)발표 준비를 서둘렀다.

김대통령이 다음날 오전으로 예정된 조각발표를 위해 박관용(朴寬用)비서실장과 이경재(李敬在)공보수석을 부른 것은 오후 3시반쯤. ‘총리 제청’ 형식을 밟기 위해 황인성(黃寅性)총리가 다녀간 직후였다.

김대통령이 상기된 표정으로 누런 봉투에서 각료명단이 적힌 메모지와 이력서들을 꺼냈다.

‘경제부총리이경식(李經植),통일부총리한완상(韓完相), 외무장관한승주(韓昇洲)….’ 김대통령이 직접 쓴 ‘문민정부 초대내각’의 각료 명단이었다.

순간 김대통령은 양복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는 “아, 여기에도 있다”며 또 몇 사람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와 이력서를 끄집어냈다. 어떤 사람의 이력서는 한동안 지니고 다녔는지 구겨져 있었다. 아예 이력서가 없는 각료도 있었다. 김시중(金始中)과기처장관의 이름은 ‘시작할 시(始)’자가 아니라 ‘때 시(時)’자로 적혀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발표된 문민정부 제1기 내각의 명단은 김대통령이 맨 처음 꺼내놓은 ‘메모 명단’과는 달랐다.

이경재공보수석의 증언. “27명의 장관급 명단을 보니 지역안배 등 몇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박실장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자리에서 조정한 끝에 5명의 명단이 바뀌었습니다.”

내무 교육 보사 체신 총무처장관이 당초명단과 달라졌다. 이를 테면 현장에서 ‘부분개각’이 이뤄진 셈이다.

메모지에는 ‘내무 김영구(金榮龜), 교육 박영식(朴煐植), 보건사회 송정숙(宋貞淑), 체신 신윤식(申允植), 총무처 신경식(辛卿植)’으로 돼있었다.

박실장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각하, 최창윤(崔昌潤)실장은 비서실장을 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는데 자리를 하나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곁에 있던 이공보수석까지 거들고 나서자 김대통령은 “글쎄 말이야…”라며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주(駐)유엔대사 명단에서 ‘최창윤’이라는 이름을 지웠다. 신경식총무처장관이 최창윤총무처장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박영식교육부장관은 전남대총장 출신의 오병문(吳炳文)장관으로 바뀌었다. 체신차관 출신으로 데이콤 사장이던 신윤식 체신부장관 내정자는 현직 체신차관인 윤동윤(尹東潤)씨로 교체됐다. 내무장관 역시 대선기간 유세단장으로 활약한 이해구(李海龜)의원에게 돌아갔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던 김대통령은 첫 조각발표 때부터 이처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결국 5년이 거의 지난 지금, ‘김영삼식 인사는 망사(亡事)의 표본’이라는 비아냥까지 듣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김대통령의 인사 실패의 원인은 여러가지를 들 수 있다. 지나친 인사결벽증, 극도의 보안의식, 국정인사에 대한 이해부족 등 여러가지가 꼽힌다. 그러나 ‘동숭동팀장’ 전병민(田炳旼)의 중도하차는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중의 이유였다.

전씨는 김대통령이 극비리에 추진한 제1기 문민정부 조각인선의 ‘유일한 실무자’인 동시에 ‘입안자’였다. ‘문민개혁 프로그램’의 설계자로 알려진 전씨는 김영삼대통령당선자의 조각인선 실무작업을 지시받고 ‘개혁총괄사령부’의 구성을 꿈꿨다.

김당선자가 구체적인 인선작업을 위해 전씨를 부른 것은 대선이 끝나고 일주일쯤 지난 92년 12월 하순.

전씨가 선거 이전부터 반년 가까이 준비한 ‘동숭동팀’의 개혁정책 요약본과 취임 후 국정운영계획에 관해 1시간 가량의 보고를 마치자 김당선자가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개혁정책 요약본을 가리키며) 이것은 전실장이 (청와대에) 들어가서 하면 될 것이고…. 무엇보다 인사가 중요하다. (개혁정책을 지칭하며) 이걸 추진할 사람들로 인선작업을 해봐.”

이에 전씨는 “저는 자신없습니다”라며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김당선자는 “나하고 같이 하는 거야”라며 말을 막았다.

김당선자의 말처럼 선거 후 취임까지 정권인수기간의 조각인선작업은 철저하게 ‘김당선자의 지시―전병민의 실무검토 및 건의’로 진행됐다. 박관용의원이 비서실장으로 내정된 2월 17일경에는 이미 국무총리 감사원장 장차관 시도지사의 인선이 거의 끝나 있었다.

전씨는 ‘동숭동팀’에서 분야별 간사역할을 하던 ‘40대 실무자’(전씨는 이들을 ‘중령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들과 함께 신라호텔 앰배서더호텔, 마지막에는 옥수동 집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극비리에 작업을 진행시켰다.

김당선자가 “새 정부일 뿐 아니라 역사적인 문민정부인데 첫 인상이 중요하다”면서 전씨에게 내린 ‘극비 인선지침’은 세가지.

첫째, 5,6공 장차관 출신은 안된다. 둘째, 군출신은 안된다. 셋째,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말이 5,6공 인사 배제이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5,6공을 세월로 환산하면 무려 12년이다. 5,6공에서 형성된 ‘인물 풀(Pool)’을 완전히 배제하고 인선작업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중령’의 증언. “전실장은 그래서 기존 정계 관계보다는 국가경영쇄신 차원에서 경제계나 기업에서 경영마인드가 있는 테크노크라트들을 충원키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여기엔 3공 때까지만 해도 공무원들이 우리 경제 발전의 주체가 될 정도로 우수했지만 이후 안일과 자만에 빠져 민간부문보다 뒤져있기 때문에 관료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실장과 우리 팀의 평소 인식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김당선자의 OK가 떨어졌고 전씨는 작업을 서둘렀다. 그러나 ‘기업마인드 조각구상’은 며칠 뒤 산산조각나고 만다.

다시‘중령’의증언.“김당선자가 평소안가(安家)처럼 사용해 온 하얏트호텔로 전실장을 불러 대뜸‘정주영(鄭周永)이를 봐라. 기업에 있는 놈들은 돈 가지고 정권잡을 궁리부터 하지 않더냐’고 하더라는 겁니다.그리고는 경제계 기업에서 각료를 충원한다는 계획은 없던 걸로 하라고 했다는 거예요.” 게다가 김당선자는 수시로‘메모지’를 내놨다.

당시 김당선자는 민자당 중진들은 물론 재계 학계 그리고 재야 인사들까지 만나 ‘새인물 천거’를 부탁했다. 그렇게 추천받은 사람을 메모지에 적어 불쑥불쑥 내밀곤 했다는 것이다.

인선리듬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면서 전씨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이러다가는 나와 호흡을 맞춰 개혁정책을 추진할 사람들마저 포진시킬 수 없을지 모른다’는 다급함마저 느껴졌다고 ‘중령’은 당시를 기억했다.

실제로 5,6공 배제에 기업쪽에서 인력공급을 하려던 계획마저 무산되는 바람에 결국 전씨의 인선작업은 ‘이삭줍기’식으로 진행되고 만다.

전씨가 내심 구상하고 있던 ‘문민개혁사령부’는 안기부장 청와대비서실장 정무수석 경제수석을 ‘바퀴의 살’로 삼고, 대통령정책수석비서관인 자신이 ‘축(軸)’이 돼 ‘문민개혁’이라는 바퀴가 대도(大道)를 굴러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전씨는 서둘렀다. 정무수석과 경제수석은 문제가 없었다. 두 자리는 ‘동숭동팀’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주돈식(朱燉植)조선일보논설위원, 박재윤(朴在潤)서울대교수로 일찌감치 내정됐다. 김당선자 역시 두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안기부장과 비서실장 인선이 난항이었다. 특히 안기부는 개혁추진과정에서 종합적인 자료분석과 지원에 적합한 곳이었고, 그리고 정부부처간 이해에 중립적이라는 점에서 전씨가 ‘개혁작업의 안가’로 생각중이었던 만큼 부장과의 호흡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원안은 공산권연구협의회장과 국제정치학회장을 지낸 이상우(李相禹)서강대교수. 하지만 이교수는 통일부총리나 외무장관을 희망하고, 고집했다. 통일부총리는 김덕(金悳)외국어대교수로, 외무장관은 한승주고려대교수로 내정돼 있었기 때문에 곤란한 희망이었다. 다음으로 한국일보사장을 지내고 당시 논설고문으로 있던 김창열(金昌悅)씨를 추천했다. 김고문은 ‘동숭동팀’의 ‘어른’이었다. 하지만 김고문 역시 고사했다.

전씨는 급히 김덕교수를 찾았다. 김교수 역시 ‘동숭동팀’의 주요 멤버. 마침 도고온천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 참석중이었다. 가까스로 전화가 연결됐다.

전병민〓“김교수님, 당선자로부터 전화가 갈 겁니다. 아마 무슨 자리 얘기를 할 겁니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제안일 것입니다. 무조건 받으십시오. 그리고 나중에 만나 설명드리겠습니다.”

김덕〓“뭔지 모르겠지만 알겠소.”

통화를 마친 전씨는 서둘러 김당선자에게 ‘통일부총리 김덕’ 대신 ‘안기부장 김덕’안(案)을 올렸다.다음날 김교수는 당선자의 전화를 받았다.

비서실장도 사정은 비슷했다. 김당선자는 ‘한완상 비서실장’을 고집했고 전씨는 최병렬(崔秉烈)의원을 생각했다. 한완상서울대교수는 김당선자가 야당을 할 때부터 도와온 ‘친(親)YS맨’. 대선 때는 ‘사조직’에 깊이 참여했다. 최병렬의원과 전병민씨의 인연은 87년 대선 때의 노태우(盧泰愚)후보 캠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의원은 이를테면 전씨의 정치권 후견인이었던 것.

하지만 최의원은 김당선자의 5,6공 인사 배제기준에 걸렸다. 전씨는 전씨대로 한완상교수와는 ‘호흡’이 맞지 않을 것으로 우려했다. 전씨는 한교수와의 인화에 자신이 없었다.

‘상도동사람’의증언.“아마 비서실장 인선문제였던것 같습니다. 김당선자가전씨에게 ‘이게 전실장 인사야’라고 언성을 높일 만큼 인선난항을 겪었던 것으로 압니다.”

‘한완상 비서실장’은 좀 수그러들었지만 김당선자는 계속 ‘민주계 비서실장’을 고집했다. 결국 전씨는 박관용실장안을 내놨다. 그러나 ‘박관용 비서실장’에 대해 김당선자는 “나보고 이기택(李基澤)이 사람을 비서실장으로 쓰란 말이냐”고 화부터 냈다. 박관용의원도 박의원대로 ‘비서실장을 맡을 수 없는 세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고사했다. 지역구 의원직을 내놔야 하고 부인이 극력 반대한다는 이유였다. 전씨는 김당선자에게 “박관용의원처럼 합리적인 일솜씨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박의원에게는 “당선자가 아마 ‘이건 명령이야’라고 할 겁니다”라고 호소했다. 박의원이 “한 사흘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김당선자는 상도동 현관까지 따라나가 “씰데없는 소리 말라”고 일축한 뒤 그냥 발표해 버리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개혁총괄사령부’는 준비됐다. 하지만 바람은 엉뚱한 곳에서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다. 92년 2월17일 청와대비서진 내정자들이 발표되자 시선은 일제히 전병민정책수석이라는 ‘베일속의 인물’에게 쏠렸다. 곧이어 동아일보에 전씨의 장인이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선생의 암살범이라는 보도가 실리면서 다름아닌 전씨 자신이 도중하차하고 만 것이다.

‘개혁총괄사령부’를 상징하던 ‘정책수석실’이라는 자리도 없어지고 말았다. 전씨가 사표를 낸 지 5일 뒤인 2월24일 이경재공보수석내정자는 정책수석실 폐지와 사회문화수석실 신설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책수석실이 마치 개혁의 총괄사령부인 것처럼 오해받고 있어 폐지키로….”

<김창혁기자>

▼「중령들」은 누구▼

전병민씨의 ‘동숭동팀’에는 각 분야별로 간사역할을 맡은 40대 실무자들이 있었다. 50대 초반인 전씨는 자신과 호흡이 맞도록 이들의 나이를 40∼45세로 제한했다. 모두 7명, 박사학위는 필수였다.

정부부처 현직 국장급 2명과 민자당 당료 2명도 포함됐었다. 부처국장급인경우전씨가 직접 해당부처장관을 만나 “6개월만 쓰겠다. 한직(閑職)으로 옮겨달라. 선거와 관련된 것이다”라고 요청했다.

40대 실무자들은 동숭동팀에 합류한 교수 연구원 언론인 등이 개혁과제를 놓고 토론할 때마다 참석, 핵심사항을 정리해 전씨에게 보고했다.

전씨는 나중에 이들을 5.16쿠데타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영관급들에 빗대 ‘중령들’이라고 불렀다. 사실 전씨와 ‘중령들’이 주도한 ‘동숭동 개혁안’은 거의 쿠데타에 가까웠다.

▼당선에서 취임까지▼

◇1992년

12월18일제14대 대통령선거

12월19일김영삼후보 당선

12월28일대통령직 인수위 발족

◇1993년

1월1일 한국은행, 92년11월말 총외채 4백19억달러라고 발표

1월3일 인수위 활동 개시

1월18일 인수위, 김영삼당선자에 광범위한 사면건의

1월26일 정계은퇴선언한 김대중씨, 연구활동차 영국행

1월30일 김당선자, 취임후 장차관급 재산공개 천명

2월6일 서울경찰청, 광운대 입시비리 발표

2월9일 정주영국민당대표, 정계은퇴 및 경제계복귀

2월10일 김당선자,민주당에 각료2명 추천의뢰

2월17일 김당선자 청와대 비서진 발표

2월20일 전병민정책수석내정자 사퇴

2월22일 김당선자, 황인성총리 이회창감사원장내정자 발표

2월23일 국회, 체육청소년부 동자부 폐지를 골자로 하는 정부조직법개정안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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