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최영일] 2009년 대중문화 코드 재해독 - ②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31일 15시 45분


황제의 서거와 여제의 등극

세계 문화산업 환경은 말 그대로 복잡계로 접어들었다. 퓨전 하이브리드 컨버전스 등의 단어는 기술 산업을 말할 때가 아니라 사회문화 현상을 설명할 때 더 적절해보일 정도다.

그 중에서도 2009년의 특징은 매우 뚜렷해보인다. 한마디로 남성은 죽고 여성은 살아남았다. 그것도 매우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회조류도 그렇지만 특히 문화영역에서 음양의 조화는 파괴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2009년 대중문화계를 결산하는 단 하나의 문구를 든다면 '황제의 서거와 여제의 등극'이 아닐까 싶다.

그 상징적 사건은 팝의 황제로 30년 이상을 풍미했던 마이클 잭슨의 사망이다. 2009년 구글의 최다검색어로 등극한 키워드 역시 그였다. 나아가 그는 장례 이후에도 수많은 괴담을 흩뿌리며 천재 아티스트이자 기인의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다.

심야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그룹 \'슈퍼주니어\'의 강인. 미국 시애틀로 출국하는 \'2PM\'의 재범. 옛 애인과 소송에 휘말린 배우 이병헌. 진행 프로그램에서 돌연 하차해 논란이 된 방송인 김제동.
심야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그룹 \'슈퍼주니어\'의 강인. 미국 시애틀로 출국하는 \'2PM\'의 재범. 옛 애인과 소송에 휘말린 배우 이병헌. 진행 프로그램에서 돌연 하차해 논란이 된 방송인 김제동.



1. 고개 숙인 남자 스타들

미국의 마이클 잭슨뿐이 아니다. 한국의 남성 연예인들은 영화 '해운대'처럼 악몽 같은 쓰나미를 겪었다. 그것도 빅3 엔터테인먼트사인 SM, JYP, YG가 골고루 도마에 올랐다.

슈퍼주니어의 강인은 폭력사건과 음주사고 뺑소니로 곤욕을 치렀고, 동방신기는 소속사와 소송갈등이 빚어졌다. 빅뱅의 G-드래곤은 첫 솔로앨범이 표절시비에 휘말린 데다 공연 퍼포먼스가 성행위를 연상시킨다는 비난을 받았다. 2PM의 인기멤버 재범은 무명시절 인터넷에 올린 글이 뒤늦게 문제가 돼 마치 유승준처럼 한국을 떠났다.

이뿐 아니다. 슈퍼주니어의 중국 출신 멤버 한경 또한 소속사와 계약문제를 제기했다. 대중음악계 외에도 드라마 '아이리스'로 브라운관을 장악한 이병헌에게도 스캔들이 터졌고, 연예인 간의 폭력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 혜성처럼 등장해 안방극장 여심을 사로잡은 '선덕여왕'의 비담 김남길은 낙마로 부상을 입더니 신종플루까지 걸렸다. 이 공포의 바이러스는 주로 남성 연예인들에게 줄줄이 확산됐다.

방송계의 퇴출괴담도 어두운 분위기를 깔았다. 윤도현의 '러브레터' 종방 이후 신경민 앵커와 손석희 교수의 프로그램 하차가 논란이 됐고 연예분야에서도 김제동의 거취가 국회에서 거론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구라의 전력에 대한 성토가 국회의원의 발표로 제기되는 기현상도 연출됐다.

윗줄 왼쪽부터 원더걸스, 소녀시대, 카라, 브라운아이드걸스. 동아일보-스포츠 동아 자료사진
윗줄 왼쪽부터 원더걸스, 소녀시대, 카라, 브라운아이드걸스. 동아일보-스포츠 동아 자료사진


2. 승승장구 '여성군단'

반면 여성군단은 대약진을 이룬 한해였다. 앞서 훑어본 남성 연예인 잔혹사와 비교하면 참으로 빛과 어둠처럼 엇갈린다.

먼저 여성 음악계에서 걸 그룹들의 끝을 모르는 도약은 수년치 진화를 한 해에 압축해 이뤘다고 평가할 만하다.

지난해 겨울 '노바디' 열풍을 만들었던 원더걸스는 팝의 종주국 미국으로 진출해 괄목할 성과를 일궈냈다. 연초부터 'Gee'로 스키니진 차림의 청순소녀 붐을 일으킨 소녀시대는 여름 다시 '소원을 말해봐'로 오빠부대, 삼촌부대 등 세대를 망라하는 남성 팬층을 밀리터리 룩으로 몰아넣었다.

이 두 걸 그룹으로 양분되었던 가요시장은 엄청난 세포분열을 일으켜 카라, 포미닛, 애프터스쿨, 브라운아이드걸스, 2NE1, 티아라 등 가히 걸들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전쟁터가 됐다. 여기에 손담비, 아이유 등의 솔로까지 가세시키면 눈이 부실 지경이다.

대중은 새로운 컨셉의 노래들, 숨 가쁘게 바뀌는 이미지와 스타일, 각자의 개성을 차별화하며 틈새를 공략하는 걸 그룹 문화의 전략적 폭격을 즐겁게 맞았다.

여기 더해 드라마는 어떠했던가?

말 그대로의 '여왕시대'를 연 '선덕여왕'의 고현정은 14년 전 '모래시계'를 능가하는 연기와 시청자 반응의 절정을 만들어냈다. 고현정에게 밀린 감은 있지만 이요원의 매력 또한 빛났다. '아이리스'에서는 주연 김태희를 밀어내며 강한 여성상의 김소연이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막장 드라마의 정점을 찍은 '아내의 유혹'의 장서희, 이와 반대선상에 있는 '내조의 여왕'의 김남주는 막장과 내조의 왕좌를 나눠가졌다.

커리어우먼의 콧대를 보여준 엣지녀로 '스타일'의 김혜수도 건재를 과시했고, 인기가 지붕을 뚫은 '하이킥' 제 2기의 황정음과 신세경 또한 신세대 스타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아역인 소공녀 분위기의 신신애와 '빵꾸똥꾸' 신드롬을 일으킨 정해리 또한 어린이 여성파워에 일조했다. 예능 분야에서 시청자의 주목을 새롭게 받은 박예진과 천하무적 이효리 역시 건재하다. 2007년이 '커피프린스 1호점'의 윤은혜가 돋보인 해였다면 2009년은 '미남이시네요'의 박신혜가 두르러졌다.

김연아는 2월 4대륙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12월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5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며 2009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김연아는 2월 4대륙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12월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5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며 2009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3. 여제 김연아의 등장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 모든 여성스타를 다 합쳐도 모자랄 '여왕 중의 여왕'이 있으니, 바로 국민여동생 김연아다.

김연아는 국민적 기대를 가녀린 한 몸에 받고,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올해의 문화인이다. 그녀와 짝으로 거론되던 수영의 박태환이 부진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 또한 남녀의 부조화에 새삼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부동의 퀸 연아는 단순히 운동선수가 아닌 아티스트다. 피겨스케이팅에 예술점수가 부여되어서만이 아니다. 올해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전 국민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우승을 한 뒤 그녀가 던진 말에 주목해야 한다. "피겨는 응원하는 스포츠라기보다는 관람하는 스포츠"라는 제안 말이다.

우리는 앞으로 김연아를 맹목적으로 응원하고 입시성적 매기듯 정량화된 점수를 확인하기에 앞서 음악과 율동, 예술적 표현이 조화를 이루는 그녀의 문화성을 누리고 감상할 여유를 가져야 할지 모른다.

영화 '해운대', '국가대표', 뮤지컬 '드림걸즈', 연극 '에쿠우스'
영화 '해운대', '국가대표', 뮤지컬 '드림걸즈', 연극 '에쿠우스'



4. 한국 영화의 대반격 그리고…연극계

올해 한국 영화계가 회복의 조짐을 보인 것은 좋은 징조였다. 특히 생소한 장르인 재난영화 '해운대'와 그야말로 루저들의 감동스토리를 멋지게 그려낸 '국가대표'의 성공은 박수칠 만하다.

하지만 보다 긍정적인 현상은 독립영화 '워낭소리'에 쏟아진 폭발적인 반응과 이후 '반두비', '똥파리' 등 인디 장르가 악착같이 살아나고 있는 점이다. 이들이 작업할 환경이 좋아졌거나 지원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악조건 속에서 생존을 위해 스스로 자구책을 찾는 독심이 강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흥행감독인 박찬욱 감독의 '박쥐', 봉준호 감독의 '마더',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각자의 작가적 성향과 성숙미를 보여준 작품들이다.

그러나 일반관객들의 과도한 기대의 결과 대작은 좋고, 소품은 별로라는 식으로 평가가 엇갈렸다. 이러한 과도한 대중성의 기대와 요구, 상업적 경향은 장르를 죽이고 작가적 실험을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경계되어야 한다.

시장이 커지고 있는 뮤지컬계는 안전지향으로 장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간 흥행이 되었던 작품이 재상연되고, 유명한 해외 오리지널 작품이 내한했다. 국내초연으로 오디뮤지컬컴퍼니가 올린 '드림걸즈'가 역대 스코어에 새롭게 추가된 정도가 반갑고, 8년 만에 장기공연이 시작된 라이선스 작품 '오페라의 유령'이 올해의 화제라 할 만하다.

대중문화 범주에 넣기엔 애매하지만 연극계도 조용히 움직였다.

막대한 비용의 마케팅 파워가 아니라 입소문으로 소극장을 찾는 발길들이 객석을 채우며 연극열전 시리즈 '웃음의 대학', '늘근 도둑 이야기' 등이 무대와 관객의 소통창구가 되었고, 오랜만에 연극계의 전설 '에쿠우스'가 더블캐스팅으로 막이 올라 입소문에 힘입어 선전하고 있다. 새롭게 개관한 명동예술극장의 '베니스의 상인'도 적절히 재해석된 셰익스피어의 고전극으로 아름답다. 8년째 여성관객과 교감하고 있는 '버자이너 모놀로그'도 3인극으로 강화되어 순항하고 있다.

SBS 버라이어티 토크쇼 '강심장'
SBS 버라이어티 토크쇼 '강심장'


덧붙여… 2010년 문화계 변화의 전망

2010년에 예상되는 변화는 올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의 극단이다. 경기가 풀리면서 실물경제에도 봄날이 올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상관없이 우리의 정서적 욕구는 올해보다 달아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문화의 양극화로 나타난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가상공간을 용광로로 하여 더 많은 가십, 더 놀라운 스캔들, 더 충격적인 구설수를 필요로 할 것이다.

TV 예능분야의 폭로전이나 버라이어티 토크쇼, 예를 들어 '강심장', '부부야' 등이 강화될 것이고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둘러싼 '낚기(fishing)'와 '낚이기' 게임이 줄줄이 사탕처럼 엮여 나갈 것이다. 내년을 예측하기도 전에 이미 레이디가가 스타일의 선정주의는 우리 연예계에 수입돼 버렸다.

영화사에 일획을 그을 '아바타'는 천재의 집념과 자본, 그리고 기술의 융합으로 대박행진을 시작했다. 12월 31일 개봉하는 블록버스터 뮤지컬 영화 '나인'도 주목된다. '주목경제'에서 승리해야 하는 자본 투하 작품들인 문화상품은 더 많은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한편 우리 문화수용자들은 그러한 것을 욕하면서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는 중독성이 있는 마약과 같다.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도 다음편이 궁금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일희일비하면서 베스트셀러를 들여다보지만 우리의 심리와 사회적 관계는 긴 호흡으로 '자정작용'을 한다. 찰나의 강한 자극을 짜릿하게 즐기지만 정서적 공허를 위해 성찰이 담긴 스테디셀러를 찾아 두리번거리게 된다.

2010년의 화두를 '인간적인', '따뜻한' 등에 둔다면 흥행 제작사들은 이 전망을 엉터리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새로운 해의 문화적 화두는 '스며드는' 능력을 가진 작품들이 될 것이며 이 생명력은 코미디든 멜로든 액션이든, 또 다른 장르이든 인간적이고 따뜻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스토리텔링에 달려 있다. 이 스토리텔링은 작품 내의 폐쇄적 완결성이 아니라 관객을 향해 열려있는 공감능력이 핵심이 아닐까?

우리는 미디어의 '속도'에 목숨을 거는 시대에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상품주기가 짧다보니 연구와 준비도 호흡이 짧고, 당연히 생명력도 짧다.(그런데 신기하게도 연예인 소속사의 계약기간은 길기도 하다.)

2010년부터는 미디어 유형이 급격히 다양화되면서 수용자들의 반란이 시작된다. 법제도와 정책의 기대효과와 관계없이 문화수용자의 조급증과 게으름증의 모순된 스펙트럼은 매우 폭이 넓어졌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문화적 상호작용은 최근 몇 년 간 공급자 주도로 이루어진 융단폭격을 어리둥절한 방식으로 흡수할 것이다.

2009년까지의 성공모델을 좇아 과잉공급을 밀어붙이는 문화공급자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자기 속도를 자기가 통제하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다. 시장소비자의 심층욕구의 변화에 따라 현명한 완급조절을 하는 대중음악, 드라마, 영화, 예능, 그리고 공연예술이 '나머지들의 교합'으로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시작될지 모른다.

최영일/ 문화평론가 vincent20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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