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랭지 배추밭에서 스노보더의 꿈을 키워 ‘배추보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상호(23·한국체대)는 2016년 12월 국제스키연맹(FIS) 카레차월드컵 4위를 차지한 뒤 당찬 포부를 밝혔다. “내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냄으로써 한국스노보드가 세계적으로 가능성 있는 종목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알파인스노보드를 즐기는 이들에게도 도전의 길이 열릴 수 있고, 선수를 양성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상호는 무명에 가까웠던 스노보더였다. 이제 막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알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때 밝힌 포부를 막연한 꿈으로 여겼던 이유다. 그러나 겁 없는 23살 청년은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기량을 뽐내며 2년 전 그렸던 그림이 허상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그 무대는 올림픽이었다. 이상호는 24일 휘닉스 스노경기장에서 열렸던 2018평창동계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에서 정상급 선수들을 차례로 꺾으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스키·스노보드 역사상 처음 나온 동계올림픽 메달이었다.
레이스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예선을 3위로 통과한 이상호는 16강부터 1대1 대결을 펼쳤다. 최대 고비는 준결승이었다. 얀 코시르(슬로베니아)와 치열한 접전 끝에 단 0.01초 차이로 결승선을 먼저 통과했다. 그러나 금메달의 문턱은 높았다. 세계랭킹 1위 네빈 갈마리니(스위스)와 맞대결에서 0.43초 뒤져 은메달에 만족해야했다.
비록 금빛 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지만, 이날 성적은 그 자체로 의미가 깊었다. 그간 불모지로 통했던 스키·스노보드 종목에서 처음 나온 동계올림픽 메달이기 때문이다.
새 역사를 써낸 이상호는 이제 더 큰 목표를 그린다. 경기 직후 “이번 메달을 통해 스노보드에 대한 지원이 좋아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그러면 유럽 선수들과도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짧은 소감 속에 밑그림은 모두 완성됐다는 뿌듯함이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