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용]‘아버지’의 이름으로

  • 동아일보

박용 산업부 기자
박용 산업부 기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2008년 대기업 부장으로 정년퇴직한 A 씨(60)는 힘들 때면 시인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을 되뇐다. A 씨에게 고난은 꽃을 피우기 위한 통과의례다. 1952년 경상도 시골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주경야독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했다. 악착같이 일하며 석·박사 학위도 땄다.

“1977년 서울 본사로 발령받아 동네 아주머니가 준 이불 한 채를 들고 상경했어요. 잠실대교를 걸어서 건너 하숙집에 갈 정도로 가진 게 없었죠. 결혼 후 판잣집 문간방에 신접살림을 차리며 ‘가난만큼은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A 씨는 다짐대로 평생을 ‘아버지’로 살았다. 미국 지사로 파견을 간 그는 한국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아내 대신 미국에서 아이 셋을 키웠다. 자식들은 미국 명문대의 의대, 공대 등에 보란 듯이 들어갔다. 주변에선 ‘자식 부자(富者)’라고 부러워했다.

남모를 고통도 커졌다. 자녀 유학비로 1년에 20만 달러씩 들어갔다. 금융자산은 눈 녹듯 사라지고, 빚은 눈 덩이처럼 불었다. 정년퇴직으로 월급이 끊기고 학비 지원이 사라졌다. 퇴직금을 헐고, 교사 아내의 퇴직금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옛 회사 동료들이 만들어준 행운의 열쇠, 장기근속 메달 등 돈 되는 건 다 팔았다. 남은 아파트 한 채도 올해 초 남의 손에 넘겼다.

속내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자식에 ‘다걸기(올인)’ 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내마저 “아이들을 불러들이고 편하게 살자”고 했다. 하지만 가난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이 용납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공부라도 못했으면 차라리 고민이 덜했을 겁니다. 내가 주저앉으면 자식들이 공부를 포기해야 하니 잠이 안 오더군요. 학기가 지날 때마다 부도 위기에 몰린 기업인처럼 속이 타들어갔어요.”

대기업 부장 경력과 학위도 재취업 시장에선 통하지 않았다. 뛴 만큼 수입이 보장되는 보험 영업을 시작했다. 믿었던 후배나 친구에게 문전박대를 당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었다.

“7월이면 저도 해방입니다. 큰놈이 미국 대학병원의 전문의로 일을 시작해요. 동생 뒷바라지는 하겠죠. 은수저는 물려주지 못했어도 아이들이 남을 도와줄 정도의 지식을 갖게 했으니 사회에 봉사하며 잘살 겁니다. 다 대한민국의 자식들 아닙니까.”

A 씨의 삶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땅의 평범한 아버지들의 얘기와 닮아 있다. 교육, 결혼 등 자녀를 위해 아낌없이 베푼 한국 가구주의 자산 감소는 미국, 일본보다 10년 정도 빠른 60세쯤 시작한다. 금융자산이 먼저 줄어 50대 중반 이상 가구의 자산 중 주택 등 실물자산 비중이 80%에 이른다. 미국은 20%, 일본은 60%다. 모아 둔 돈은 없는데 은퇴 후 재취업 문은 바늘구멍이다. 집에서 쉬는 40, 50대 중고령 인력이 60만 명에 육박한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내준 이들에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가 돌려줄 건 별로 없다. 은퇴한 아버지들이 경력을 살려 재취업할 수 있는 전직(轉職)지원시스템부터 선진국 수준으로 손질하는 게 그들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게 아닐까. 베이비부머 세대(1955∼63년생) 아버지들의 은퇴 행렬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박용 산업부 기자 parky@donga.com
#아버지#베이비부머#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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