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승부차기, 그 살벌한 카타르시스[장환수의 수(數)포츠]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14일 11시 27분


코멘트
환호하는 리오넬 메시  루사일=AP 뉴시스
환호하는 리오넬 메시 루사일=AP 뉴시스
아르헨티나 첫 번째 키커 리오넬 메시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브라질 다섯 번째 키커 네이마르는 공을 차보지도 못한 채 그라운드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최고의 이벤트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준결승전은 성사되지 않았다. 브라질은 10일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와 연장까지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2-4로 졌다. 아르헨티나 역시 네덜란드와 연장까지 2-2로 맞섰지만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이겼다.
눈물 짓는 네이마르(왼쪽) 도하=AP 뉴시스
눈물 짓는 네이마르(왼쪽) 도하=AP 뉴시스

이변의 연속인 카타르 대회는 16강 토너먼트가 열리자 승부차기가 속출하고 있다. 16강전에선 모로코가 스페인을, 크로아티아가 일본을 승부차기에서 눌렀다. 월드컵 본선에서 4번의 승부차기가 나온 것은 이미 타이기록이다. 1990년, 2006년, 2014년, 2018년에 이어 다섯 번째. 아직 4경기(25%)가 남아 있다. 준결승전은 아르헨티나-크로아티아(14일), 디펜딩 챔피언 프랑스-모로코(15일)의 대결로 압축됐다.
11미터 러시안 룰렛…영웅이냐, 역적이냐
축구는 무승부가 가장 많은 종목이다. 정규 90분에 연장 30분을 뛰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할 때가 많다. 골이 잘 나오지 않게 설계된 탓이다. 리그에선 무승부를 그냥 놔두면 되지만, 토너먼트에선 어떻게든 상위 진출 팀을 가려야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동전 던지기나 다음날 재경기를 했는데 형평성 논란이 있어 고안된 게 승부차기다. 월드컵 본선에선 1982년 스페인 대회에 처음 적용됐다. 이번 대회 무승부는 13일 현재 60경기에서 14경기가 나왔다. 평소보다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23.3%나 된다. 승부차기는 승리 팀을 가리지만 공식 기록으로는 무승부다.

승부차기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강인한 정신력이 더 필요하다. 행운도 따라야 한다. 이변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론적으로는 키커가 절대 유리하다. 보통 초속 25m(시속 90km로 중거리 슛에 비해 약한 편)의 스피드로 차면 공이 골대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0.44초다. 이에 비해 골키퍼가 공이 떠나는 것을 보고 반응하는 시간은 약 0.6초다. 볼을 향해 몸이 가는 시간도 필요하다. 따라서 골키퍼는 미리 수집한 키커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예측 방어를 한다. 결국 키커가 사각의 모서리로 제대로 차기만 하면 막기 힘들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승부차기 성공률은 의외로 낮다. 경기 중 페널티킥 성공률은 70~80%에 이르지만 승부차기는 훨씬 떨어진다. 이번 대회 4경기 승부차기 성공률은 64.7%(34번 슈팅해서 22골)에 불과하다. 승부차기에서 실축할 경우 패배가 확정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되면 성공률은 50% 이하로 떨어진다는 조사도 있다.

크로아티아 선수들이 브라질과 8강전 승부차기에서 승리가 확정되자 환호하고 있다. 도하=AP 뉴시스
크로아티아 선수들이 브라질과 8강전 승부차기에서 승리가 확정되자 환호하고 있다. 도하=AP 뉴시스
승부차기의 심리학
키커는 한 번의 기회만 갖지만 골키퍼는 다섯 번 선다. 키커는 못 넣는 순간 바로 역적이 된다. 골키퍼는 5개 중 한두 개만 막으면 영웅이 될 수 있다. 키커에 비해 심리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을 5-3으로 꺾고 4강에 올랐다. 이운재는 4번 중 1번만 막고도 영웅이 됐다. 스페인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는 5번 모두 실패했지만 비난의 화살은 유일하게 실축한 영건 호아킨 산체스에게 집중됐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이끈 로베르토 바조는 한순간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직행하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사상 최초로 결승 승부차기까지 간 브라질과 경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선 그는 홈런슛을 해 2-3 패배의 원흉이 됐다. 당시 그의 페널티킥 성공률은 86%였다. 그가 골을 넣었더라도 브라질의 마지막 키커가 성공하면 이탈리아가 지는 상황이었지만 팬들에겐 제단에 바칠 희생양이 필요했다. “득점은 그때뿐이다. 실축은 모든 이에게 영원히 기억된다. 나는 4년간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악성 훌리건과 도박꾼으로부터 살해 협박까지 받았던 바조의 훗날 고백이다.

승부차기는 키커의 순서가 중요하다. 기선 제압을 해야 하는 1번 키커는 팀의 주장이나 에이스가 맡는다. 메시는 항상 1번이다. 2번은 주로 그물망을 찢을 만큼 힘이 좋은 젊은 선수가 맡는다. 5번 키커는 승부를 마무리하는 역할이기에 1번과 마찬가지로 믿을 만한 선수의 몫이다.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포르투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선호하는 순번이다. 확률적으로는 가장 잘하는 선수 순으로 나가는 게 맞지만, 심리적인 요인이 워낙 크기 때문에 5번 키커의 역할이 강조된다. 한일 월드컵 스페인과의 승부차기 때 한국 순번은 1번 황선홍, 2번 박지성, 5번 홍명보였다.

모로코와 8강전에 교체 멤버로 나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도하=AP 뉴시스
모로코와 8강전에 교체 멤버로 나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도하=AP 뉴시스
대체로 선공을 하는 팀이 유리하다는 게 정설이다. 먼저 골을 넣으면 상대 팀은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한때 테니스의 타이브레이크처럼 선공 팀 선수가 슛을 하면 후공 팀 선수 2명이 차고, 다시 선공 팀이 2번 차는 방식이 논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후공 팀의 승률이 엇비슷해지면서 없던 일이 됐다. 승부차기까지 가면 약팀이 강팀보다 승률이 높다는 통계도 있다.

월드컵 본선 승부차기 역사(13일 현재)

경기
결과
서독 vs 프랑스
1982년 준결승
서독 5-4 승
브라질 vs 프랑스
1986년 8강전
프랑스 4-3 승
서독 vs 멕시코
1986년 8강전
서독 4-1 승
스페인 vs 벨기에
1986년 8강전
벨기에 5-4 승
아일랜드 vs 루마니아
1990년 16강전
아일랜드 5-4 승
아르헨티나 vs 유고슬라비아
1990년 8강전
아르헨티나 3-2 승
아르헨티나 vs 이탈리아
1990년 준결승
아르헨티나 4-3 승
서독 vs 잉글랜드
1990년 준결승
서독 4-3 승
멕시코 vs 불가리아
1994년 16강전
불가리아 3-1 승
루마니아 vs 스웨덴
1994년 8강전
스웨덴 5-4 승
브라질 vs 이탈리아
1994년 결승
브라질 3-2 승
아르헨티나 vs 잉글랜드
1998년 16강전
아르헨티나 4-3 승
이탈리아 vs 프랑스
1998년 8강전
프랑스 4-3 승
브라질 vs 네덜란드
1998년 준결승
브라질 4-2 승
스페인 vs 아일랜드
2002년 16강전
스페인 3-2 승
스페인 vs 대한민국
2002년 8강전
대한민국 5-3 승
스위스 vs 우크라이나
2006년 16강전
우크라이나 3-0 승
독일 vs 아르헨티나
2006년 8강전
독일 4-2 승
잉글랜드 vs 포르투갈
2006년 8강전
포르투갈 3-1 승
이탈리아 vs 프랑스
2006년 결승
이탈리아 5-3 승
파라과이 vs 일본
2010년 16강전
파라과이 5-3 승
우루과이 vs 가나
2010년 8강전
우루과이 4-2 승
브라질 vs 칠레
2014년 16강전
브라질 3-2 승
코스타리카 vs 그리스
2014년 16강전
코스타리카 5-3 승
네덜란드 vs 코스타리카
2014년 8강전
네덜란드 4-3 승
네덜란드 vs 아르헨티나
2014년 준결승
아르헨티나 4-2 승
스페인 vs 러시아
2018년 16강전
러시아 4-3 승
크로아티아 vs 덴마크
2018년 16강전
크로아티아 3-2 승
콜롬비아 vs 잉글랜드
2018년 16강전
잉글랜드 4-3 승
러시아 vs 크로아티아
2018년 8강전
크로아티아 4-3승
일본 vs 크로아티아
2022년 16강전
크로아티아 3-1 승
모로코 vs 스페인
2022년 16강전
모로코 3-0 승
크로아티아 vs 브라질
2022년 8강전
크로아티아 4-2 승
네덜란드 vs 아르헨티나
2022년 8강전
아르헨티나 4-3 승
팬들은 흥미진진, 팀과 선수는 극한상황
크로아티아는 승부차기 신흥 강호다. 2018년과 올해 내리 4승을 거둬 승률 100%를 자랑한다. 2018년 러시아 대회에선 역대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차지했다. 독일도 4승 무패이지만 2006년 이전 일이다.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팀은 아르헨티나로 5승 1패다. 그러나 1990년과 2014년 준결승에서 승리하고도 결승에서 모두 독일에 패배하는 바람에 빛이 바랬다.

전통의 강호 이탈리아 잉글랜드 네덜란드 스페인 멕시코는 승부차기만 가면 새가슴이 된다. 이탈리아는 1994년 브라질과 결승전을 포함해 우승 문턱에서 3번이나 패퇴했지만 2006년 프랑스와 결승전에서 승부차기로 우승컵을 안아 한을 풀었다. 당시엔 프랑스의 다비드 트레게제가 역적이 됐다. 무적함대 스페인은 한국을 비롯해 벨기에, 러시아, 모로코 등 상대적으로 약한 팀에 4패(1승)를 당해 승부차기 최다 패배 불명예를 안았다. 지난 모로코전에선 3명의 선수가 잇달아 실축해 0-3으로 졌다. 2006년 스위스가 우크라이나와 16강전에서 당한 0-3 패배에 이은 두 번째 무실점 패배였다.

주요 국가 월드컵 본선 승부차기 성적(다승순)
국가
성적
비고
아르헨티나
5승 1패
1990년, 2014년 준결승 승리 후 결승에서 모두 독일에 패배
크로아티아
4승
2018년 2승한 기세를 몰아 준우승, 2022년 2승 중
독일
4승
서독 시절 3승, 1990년 잉글랜드와 준결승 승리 후 우승
브라질
3승 2패
1994년 이탈리아와 결승전 최초 승부차기 우승
프랑스
2승 2패
1998년 이탈리아와 8강전 승리 후 우승
대한민국
1승
2002년 스페인과 8강전 승리, 아시아 국가 최초 4강
이탈리아
1승 3패
우승 문턱 3연패 후 첫 승리가 2006년 프랑스와 결승
잉글랜드
1승 3패
1990년 독일과 준결승 패배
네덜란드
1승 3패
1998년 브라질, 2014년 아르헨티나와 준결승 패배
스페인
1승 4패
벨기에, 대한민국, 러시아, 모로코에 패배, 모로코전 0-3 패배
일본
2패
2010년 파라과이, 2022년 크로아티아와 16강전 패배
멕시코
2패
1986년 독일과 8강전, 1994년 불가리아와 16강전 패배
호주는 올해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페루를 꺾는 등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승부차기로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내는 진기록을 세웠다. 비공인 기록이지만 2019년 6월 9일 청주 대성고와 용인 태성 FC의 무학기 전국고교대회 8강전에선 양 팀 합쳐 62번째 키커까지 나오는 1시간 승부차기 끝에 태성이 29-28로 승리했다.

잉글랜드 페널티킥 전담 키커 해리 케인. 프랑스와 8강전에서 첫 번째 페널티킥은 넣었지만 두 번째 기회는 살리지 못했다. 알코르=AP 뉴시스
잉글랜드 페널티킥 전담 키커 해리 케인. 프랑스와 8강전에서 첫 번째 페널티킥은 넣었지만 두 번째 기회는 살리지 못했다. 알코르=AP 뉴시스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 시절 98골을 넣었지만 페널티킥 골은 전무했다. 만약 그가 페널티킥도 했다면 연간 3골씩만 따져도 30골은 더 넣었을 것이다. 손흥민도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페널티킥 골이 없는 역대 10번째 득점왕에 올랐다. 손흥민은 대표팀에선 코너킥과 프리킥을 자주 하지만 토트넘에선 공격 듀오인 잉글랜드의 해리 케인이 전담 키커를 맡고 있다. 이런 케인도 지난 프랑스와의 8강전에선 망신을 당했다. 케인은 후반 9분 페널티킥으로 1-1 동점을 만들며 월드컵 최다인 통산 4번째 페널티킥 득점을 올렸다. 그러나 1-2로 뒤진 후반 36분 다시 맞은 페널티킥 기회에선 실축해 패배의 책임을 져야 했다.

무승부 때 승부를 결정짓는 방법으로 야구와 당구는 승부치기, 골프는 서든데스 연장전, 테니스는 타이브레이크, 양궁은 슛오프, 배구 탁구는 듀스 등이 있다.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