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문 열어!” 고함치며 문 때려부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8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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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옷 얘기 좀 해볼까요. 정장을 잘 차려 입은 남자를 보면 “와! ‘수트빨’ 산다”고 하죠. 미국에서는 ‘정장빨’ ‘수트빨’ 좋은 남자를 가리켜 ‘브룩스 브라더스족(族)’이라고 합니다.

미국 여행객이나 연수, 유학생들이 워낙 많은 시대이니 아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브룩스 브라더스는 정장 판매 회사입니다. ‘저렴이’가 아니라 고가 기성복을 판매합니다. 오프라인 샵들은 최근 경기 한파로 파산 신청을 냈지만 브랜드는 건재하고 온라인 판매는 성업 중이죠. 그런데 미국 대선 역사에서도 브룩스 브라더스가 등장합니다. “미국 대통령이 브룩스 브라더스 옷을 즐겨 입는다”라는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미국 패션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장 브랜드 ‘브룩스 브라더스’ 광고. 여성 정장도 판매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남성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진출처 브룩스 브라더스 온라인 브로셔
미국 패션 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장 브랜드 ‘브룩스 브라더스’ 광고. 여성 정장도 판매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남성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진출처 브룩스 브라더스 온라인 브로셔

선거는 민주국가에서 가장 합법적인 의사 표현 방법입니다. 반면 폭력은 가장 불법적인 정치행태라고 할 수 있죠. 합법의 정점 선거에 끼어든 가장 불법적인 폭력 사태, 그 교차점에 브룩스 브라더스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냐구요.

미국처럼 자기 나라 선진 정치를 금쪽같이 떠받드는 나라에서 대선 현장의 폭력사태는 정말로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0년 대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와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대결했을 때입니다.

사건은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벌어졌습니다. 미국 대선에 관심 없는 분들이라도 ‘플로리다 재검표’ 논란은 아실 겁니다. 정확히 말해 마이애미 데이드 카운티 선거구에서 벌어졌죠.

우리나라 TV에서 미국 대선일 풍경 비춰줄 때 투표용지를 개표하는 선거요원들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책상에 둘러앉아 수작업으로 열심히 세고 있죠. 그 작업은 투명선거를 위한 언론 공개가 원칙입니다. 워싱턴 특파원 때 보니 선거관리위원회가 기자들에게 개표작업 참관을 원하는지 사전 신청을 받더군요. 물론 개표 요원과 참관인들 사이에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코로나19 시대의 새로운 풍속도. 마스크를 쓴 선거 개표 요원들. 사진출처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
코로나19 시대의 새로운 풍속도. 마스크를 쓴 선거 개표 요원들. 사진출처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

당시 데이드 카운티 선거구 개표 수작업 결과 1만 750여 표가 실제 투표인 수와 차이가 났습니다. 그러자 카운티 선거당국은 기계를 이용한 개표 작업을 다시 한번 진행하기 위해 기계가 설치된 옆방으로 투표용지를 가져가려고 했죠. 정확히 말해 그 기계를 ‘밸럿 스캐닝 머신(ballot scanning machine)’이라고 합니다. 당시 민주 공화 양당의 전국위원회에서 파견된 선거 참관인들도 많이 보고 있었는데요. 마감 시간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던 선거당국이 양당 위원회나 선거본부 측 참관인들과 충분한 사전 협의 없이 투표용지를 옮겼던 게 문제의 발단입니다.

당시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앞서던 상황이었죠. 투표용지를 옮기자 안 그래도 재검표 작업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공화당 측 참관인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선거 관계자들이 재검표 기계가 있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자 이를 열려는 공화당 참관인들이 문을 부수고 난리도 아니었죠.

지난해 공화당 의원들은 ‘브룩스 브라더스 폭동 2.0’이라는 이름으로 재현 행사를 마련했다. 2000년 당시에는 워낙 폭력사태가 급작스럽게 발생해 자료 사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진출처 가디언
지난해 공화당 의원들은 ‘브룩스 브라더스 폭동 2.0’이라는 이름으로 재현 행사를 마련했다. 2000년 당시에는 워낙 폭력사태가 급작스럽게 발생해 자료 사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진출처 가디언

당시 월스트리트저널 보도를 보면 “브룩스 브라더스 정장에 에르메스 넥타이, 손에는 휴대전화를 든(휴대전화가 흔치 않던 시절이므로) 공화당 참관인들이 ‘빨리 문 열어!’ ‘하던 일 못 멈춰!’라고 고함을 치며 문을 때려 부쉈다”고 합니다.

이 날은 선거일. 마이애미 일반 유권자들의 의상은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겠죠. 공화당 시위자들의 의상이 얼마나 도드라졌는데 이들을 가리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시위를 ‘브룩스 브라더스 폭동’이라고 하죠. 미국 선거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큰 사건입니다.

결국 기계 재검표는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민주당의 고어 후보는 재검표를 포기하고 선거결과에 승복했죠. 당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선거 난동꾼이었지만 공화당의 부시 진영에게는 승리의 수훈갑이었죠. 그들은 부시 행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차지하며 영전했습니다.

당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 주동자 중에서 아직까지도 친숙한 이름이 있습니다. 올해 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관련된 러시아 스캔들 공판에서 위증 혐의로 실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갈 위기에 처했던 정치 컨설턴트 로저 스톤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GOP 히트맨(공화당 청부살인업자)이야”라고 공공연히 홍보하고 다니는 약간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인데요.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전 마지막 권한으로 스톤에 대한 사면 결정을 내려 감옥행을 면하게 해주면서 미 정치권이 소란스러웠죠.

2000년 폭동 주동자였던 로저 스톤의 올해 2월 러시아 스캔들 관련 선고공판 출석 때 모습. 눈길 끄는 패션이 “역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 출신답다”는 평을 들었다. 사진출처 포천
2000년 폭동 주동자였던 로저 스톤의 올해 2월 러시아 스캔들 관련 선고공판 출석 때 모습. 눈길 끄는 패션이 “역시 ‘브룩스 브라더스 군단’ 출신답다”는 평을 들었다. 사진출처 포천

요즘 미국 사회를 보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 인종차별 반대 무드에, 대선 불안까지 겹치면서 ‘브룩스 브라더스 폭동’ 비슷한 것이 또 한번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브룩스 브라더스’가 아니겠죠. 2000년 당시야 정보기술(IT) 활황으로 경제적 거품이 잔뜩 끼어있을 때니 정장을 빼입고 시위를 벌였죠. 지금은 ‘AR-15 폭동’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습니다. ‘AR-15’는 미국인들이 많이 소지하고 있는, 총기사고 때마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콜트사의 반자동 소총입니다. 시대가 이렇게 변한 것이죠.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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