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생존자 獨영화제작자 아르투르 브라우너 별세

  • 뉴시스
  • 입력 2019년 7월 8일 06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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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100세 .. "오이로파 오이로파"등 전후 수백편제작

폴란드 출생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2차 세계대전이후 독일 영화계의 가장 뛰어난 제작자였던 아르투르 브라우너가 7일(현지시간 ) 서거했다. 향년 100세.

브라우너 가족은 그가 베를린에서 운명했다고 발표했고 독일 dpa 통신이 이를 처음 보도했다.

독일의 모니카 그뢰터스 문화부장관은 “독일이 전후세대의 가장 위대한 영화제작자 가운데 한 명을 잃었다”면서 브라우너는 “독일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선물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브라우너가 독일에서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 것이 독일의 민주주의 재건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는것이다.

그는 또 브라우너가 수 십년 동안에 걸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잊지 않게 하려는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이를 위해 헌신해 온데에 대해서 감사를 표했다.

브라운은 수 백편의 영화들을 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1960년대 독일 표현주의 걸작인 “마부제 박사”같은 범죄영화와 로미 슈나이더가 출연한 “걸스 인 유니폼”(Girls in Uniform) 도 포함되어 있다.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영화도 여러 편 제작했다.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골든 글로브상 수상작 “오이로파 오이로파”도 그 중 한 편으로, 유대인이란 사실을 숨기려고 나치독일의 히틀러 소년단에 입대한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2003년 제작한 “바비 야르”(Babi Yar)는 1941년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로, 실제로 브라우너의 친척들이 그 곳에서 여러명 살해당했다.

브라우너는 이 영화가 독일에서 흥행이 신통치 않자 실망해서 “독일의 영화관중이 정치적으로 성숙해 있는지를 시험해 본 것인데 실망스럽다. 명백하게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시대를 무대로 한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핀치-콘티니의 정원”의 제작에도 참여, 1972년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받게 했다.

브라우너 자신이 꼽은 가장 중요한 영화는 1948년의 “모리투리”(Morituri . 라틴어로 곧 죽을 사람이라는 뜻 )였다. 이 영화는 강제수용소의 재소자 한 무리가 2차대전 종전 직전에 폴란드인 의사의 도움으로 탈출하는 내용이다. 발표 당시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브라우너는 “나치의 희생자 문제를 제대로 다룬 사실상의 첫 영화”라며 소중히 생각했다.

그는 종전 후 자기가 만든 가벼운 영화들은 대중의 취향에 잘 맟춘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8년독일 푼케(Funke)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무서운 전쟁을 겪고 난 뒤 즐겁고 재미있는 것을 더 원했고, 나는 대중의 그런 욕구를 감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끈질긴 열성도 성공에 도움이 되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1955년의 “더 래츠” ( The Rats )의 주연으로 마리아 셸을 출연시키기 위해 동독에서 서독, 베를린에서 뮌헨까지 무려 36번이나 낡은 폴크스바겐 승용차를 몰고 설득하러 다닌 사실도 있다. 결국 마리아 셸은 이 영화에서 무일푼으로 임신까지 한 여주인공을 맡았다.

브라우너는 세계 영화계에서 두 번 다시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면서, 그 대신 다시 한 번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은 너무도 많다고 했다.

그는 최근 몇 해 동안에는 유럽에서 극우파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했다.

“나는 젊은이들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전 세계의 극우파 포퓰리즘 세력의 손에 떨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청년들은 온 힘을 다해서 더 늦기 전에 당장 국수주의, 인종차별주의, 반유대주의, 외국인혐오 같은 것에 저항해야만 한다”고 2018년 dpa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1918년 8월1일 폴란드의 도시 우치에서 유대인 목재상의 아들 아브라함 브라우너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방과후에 곧장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다. 1936년 고교 졸업후에는 중동으로 향하는 청년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원정침에 합류하기도 했고 우치에서 계속 공부하다가 1939년 나치 독일의 침공을 맞았다.

브라우너는 부모와 4형제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전쟁을 피했다. 전쟁 뒤에는 부모가 이스라엘로 이민을 떠난 뒤 미국이민을 생각하다가 형 울프와 함께 베를린에 정착했다.

브라우너는 서독에서 센트럴 시네마 영화사를 공동설립했고 이 회사는 유럽 최대의 영화사로 성장했으며 1960년대에는 TV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100세가 된 최근에도 매일 딸 앨리스와 함께 영화대본을 두고 토론을 벌였고 “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이 내가 일을 그만두는 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2017년 타계한 아내 마리아와 1947년에 결혼했고 4남매의 자녀를 남겼다.

【베를린=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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