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해땐 이곳으로”… 시민들이 구조거점 마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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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리나 10년, 현장을 가다<하>]

‘여기가 구조 거점’ 한눈에 쏙 뉴올리언스 중심가 노스램파트 거리에 세워진 ‘구조 거점’. 재해가 
발생하면 이곳으로 모이라는 표지이다. 설치미술가 더그 콘펠드 씨의 작품으로 시민들의 위기 극복 의지를 상징한다. 시내 전체에 총 
17개가 있으며 개당 건립 비용 약 20만 달러(약 2억2600만 원)는 모두 시민 모금으로 충당했다. 뉴올리언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여기가 구조 거점’ 한눈에 쏙 뉴올리언스 중심가 노스램파트 거리에 세워진 ‘구조 거점’. 재해가 발생하면 이곳으로 모이라는 표지이다. 설치미술가 더그 콘펠드 씨의 작품으로 시민들의 위기 극복 의지를 상징한다. 시내 전체에 총 17개가 있으며 개당 건립 비용 약 20만 달러(약 2억2600만 원)는 모두 시민 모금으로 충당했다. 뉴올리언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뉴올리언스=하정민 기자
뉴올리언스=하정민 기자
최악의 자연재해 ‘카트리나’를 겪은 미국 뉴올리언스의 현재는 재해 자체보다 그 이후의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미 정부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대목은 피해자의 심리치료. 10년간 멈추지 않고 체계적으로 피해자를 돌봐 왔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 10년째 피해자 트라우마 치료

8일 오전 어린이 심리치료 전문병원 머시 센터를 찾았다. 이 병원은 미 보건복지부 산하 약물남용정신건강서비스국(SAMHSA)과 손잡고 카트리나 피해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전문 심리상담 및 치료를 제공하고 있었다.

의사, 임상심리학자, 심리상담가, 사회복지사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들이 주 1회, 회당 약 1시간씩 각 학교를 찾아 정신적 피해가 큰 아이들을 대상으로 개인별 상담 및 치료를 한다. 학교에 소속된 상담교사, 학생의 부모에 대한 상담 및 지도까지 병행한다. 연간 치료비 40만 달러는 미 정부가 부담한다. 일부 종교단체와 독지가들의 현금 기부, 전문가들의 재능 기부 등도 더해진다. 지난 10년간 치료를 받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3만 명이 넘는다.

카트리나가 발생했을 때 미국도 연방정부의 비효율과 무기력이 큰 문제로 지적됐었다. 그러다 보니 뉴올리언스 시민들 사이에는 재해 후 ‘정부를 믿지 말고 나 자신을 믿자’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루이지애나주립대 보고서에 따르면 카트리나 후 뉴올리언스 주민의 24%가 시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공공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카트리나 전 참여율이 미미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이다. 보스턴 출신으로 25년째 뉴올리언스에서 거주하며 프랜차이즈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마이크 파워스 씨(45)는 “카트리나 당시 목격했던 정부의 무능이 역설적으로 시민들의 재해 복구 및 시정 참여 의지를 높였다”며 “모든 사람이 일종의 행정가로 변신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고 강조했다

교육개혁도 덤으로 얻은 변화. 공립학교의 상당수가 파손되면서 공교육의 공동화가 이뤄지자 주민들 스스로 자율형 공립학교(차터스쿨)를 세웠다. 이곳 재학생 비율은 미 최고 수준인 전체 학생의 무려 70%에 달한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재해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도로 곳곳에 설치된 ‘구조 거점(evacuspot)’. 시내를 걷다 보면 사람이 한 손을 높이 든 모양의 독특한 철제 구조물을 여럿 발견할 수 있는데 2013년 6월 만들어진 약 4m 높이의 이 설치물은 ‘재해 때 이곳으로 모여라. 곧 구조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사진작가 겸 사회운동가 로버트 포가티 씨. 카트리나 직후 재난대피 자원봉사 시민단체를 만들기도 했던 그는 대피로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물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숨졌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총 17개의 구조 거점을 설치했다.

○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다

더는 이런 슬픔 없게… 카트리나 참사로 어머니와 손녀를 잃은 로버트 그린 씨 집 앞마당에 놓인 추모석. 뉴올리언스 서부 흑인 밀집 지역인 이 마을에서만 1000명이 숨졌다.
더는 이런 슬픔 없게… 카트리나 참사로 어머니와 손녀를 잃은 로버트 그린 씨 집 앞마당에 놓인 추모석. 뉴올리언스 서부 흑인 밀집 지역인 이 마을에서만 1000명이 숨졌다.
카트리나 후 이곳 사람들은 건축양식도 바꿨다. 강변과 가까운 동네에는 제방이 세워졌고 신축 주택들도 물난리에 견딜 수 있도록 1층을 지상에서 띄웠다. 하지만 곳곳에는 아직도 참혹한 상처가 그대로인 곳도 많았다.

카트리나로 인한 전체 사망자 1833명의 54%가 발생한 최대 피해 지역 로어나인스워드에 있는 로버트 그린 씨(61) 집 앞마당에는 카트리나로 목숨을 잃은 그의 어머니와 손녀를 기리는 추모석이 있었다. 그린 씨는 카트리나가 닥치자 온 가족을 끌고 지붕 위로 올라갔지만 지붕이 무너지면서 어머니와 손녀를 잃었다. 손녀의 시신은 지금도 찾지 못한 상태. 어머니의 시신도 넉 달 후에 발견되어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복구가 아직도 느리다는 불만들도 있었다.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살다가 4년 전 이사 왔다는 챈시 헨스 씨(67)는 “살기 좋은 주거지로 만들어 주겠다는 정부 약속을 믿고 둥지를 틀었는데 복구 속도가 느려 실망스럽다”며 “복구 과정에서 부동산 붐만 일어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로어나인스워드 한복판을 남북으로 가르는 클레이번 애버뉴에서는 극심한 빈부격차도 보였다. 북쪽은 신규 주택이 많은 깔끔한 주거지였지만 남쪽은 풀뿌리와 잡초가 무성한 폐가들이 즐비해 한낮에 차를 타고 지나가는데도 오싹했다.

카트리나 전 뉴올리언스의 흑인 비율은 약 70%에 달해 ‘초콜릿 도시’로도 불렸었다. 최근에는 총인구가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비율이 59%로 떨어졌다. 2013년 기준 뉴올리언스 거주 백인 남성의 평균 연봉은 5만7684달러, 흑인 남성은 절반 수준인 3만4815달러에 그쳐 격차도 더 심해졌다.

‘카트리나 10년’을 맞아 루이지애나주립대가 실시한 뉴올리언스의 복원 정도 및 삶의 질을 묻는 만족도 조사에서 백인 80%는 “완벽하게 복구됐고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고 했지만 흑인 응답자의 60%는 “모든 면이 더 나빠졌다”고 답했다.

뉴올리언스=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재해#시민#구조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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