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판 대타협은 없다. 미국 연방정부 예산이 자동으로 줄어드는 이른바 ‘시퀘스터(sequester)’ 발동을 하루도 채 안 남긴 28일 오전까지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 지도자들은 협상 테이블에도 마주 앉지 않았다. 이에 국제신용평가 회사 피치는 미 정치권이 정치적 논쟁을 계속하면 국가신용등급을 현재 최고등급인 트리플A(AAA)에서 낮출 수 있다고 경고했다.
양측은 시퀘스터 발동 이후인 1일 만나기로 했지만 상대방에 정치적 부담을 떠넘기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치권의 무책임한 ‘폭탄 돌리기’에 싫증난 미국인들은 관련 뉴스에 눈과 귀를 닫고 있다.
장외를 돌며 공화당을 압박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의회로 돌아와 여야 지도자들을 만났지만 시퀘스터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 대신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오바마 대통령이 급격한 예산 삭감의 영향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를 위해 1일 백악관에 여야 지도부를 초청했다”고 밝혔다.
회동에는 공화당 소속 존 베이너 하원의장과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 민주당 소속의 낸시 펠로시 하원 원내대표와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가 참석할 예정이다. CNN은 공화당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대통령이 시퀘스터 시작 첫날 적어도 의회와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며 극적인 돌파구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여야 회동이 1일로 잡히면서 정치권과 여론에는 시퀘스터를 일단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이 급속히 퍼졌다. 상원 양당 지도부가 협상이 가능한 마지막 날인 28일 각각의 대체 법안을 내놓더라도 통과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주요 공항은 연방 관제사들이 대거 무급 휴가를 갈 경우에 대비한 운영 방안을 점검했다고 언론들이 전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마지막 여론전을 계속했다. 안 덩컨 교육장관은 카니 대변인과 함께 백악관 기자회견에 나와 교사 무급 휴가, 저소득층 학생 및 장애아에 대한 정부 교육 지원 감축 등을 경고했다.
톰 빌색 농무장관은 육류 및 가금류 가공업체 6000여 곳의 검역 직원들이 15일의 무급 휴가를 써야 하기 때문에 대규모 공급 부족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마음 급한 행정부의 무리수가 속속 드러나면서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덩컨 장관은 24일 방송된 CBS의 ‘페이스 더 네이션’ 프로그램에 나와 버지니아 주 커나 카운티를 적시해 “교사들이 해고통지서를 받을 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WP)는 ‘팩트 체커’ 코너를 통해 “시퀘스터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덩컨 장관에게 피노키오 4개의 거짓말 등급을 매겼다.
공화당은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최근 구금 중이던 불법 이민자 300여 명을 풀어 준 것에 대해 이틀째 거센 공세를 폈다. 백악관은 “ICE가 사전 상의 없이 한 일”이라고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베이너 하원의장은 소속 의원들의 군용기 사용을 자제시켜 시퀘스터로 인한 군사력 공백 메우기에 동참하겠다며 여론전을 폈다.
이런 가운데 닉슨 대통령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 보도로 미국 언론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밥 우드워드 WP 부편집인은 MSNBC 방송의 ‘모닝 조’ 프로그램에 출연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시퀘스터를 이유로 항공모함 배치 등 군사 조치를 유보한 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라면서 국가 안보를 예산 논쟁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전략이라고 맹비난했다. 이날 오후 CNN에 출연해서는 “백악관의 고위 관리가 나에게 연락을 해 ‘그런 식으로 말한 데 대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폭로했다.
CNN 선임 정치분석가인 데이비드 거겐은 “미 국민은 (정치권의 시퀘스터) 드라마에 질려 큰 관심이 없다. 요즘처럼 리더십이 실종된 시대를 떠올리기 힘들다”며 오바마 대통령과 의회를 싸잡아 비난했다. WP는 27일자 1면 기사를 통해 시퀘스터의 영향이 한날한시에 모든 미국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며 “연방정부 지출로 운영되는 워싱턴 등 수도권과 군수산업 지역, 저소득층 밀집 지역 등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 거주지가 가장 빠르면서도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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