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체결하기 전 청구권 금액을 계산하면서 한국인 강제동원에 대한 사죄나 배상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등 식민지 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나 반인도적 행위에 대한 청구권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실마리를 찾은 셈이다.
도쿄신문은 19일 일본 외무성이 최근 시민단체 ‘일한회담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에 공개한 한일 국교정상화 관련 일본 측 외교 문서를 확인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당시 관방장관은 한일 청구권 경제협력 협정으로 한국에 5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지급하기 3년 전인 1962년 외무성과 대장성(현 재무성)에 한국의 대일 청구권 규모를 계산해보라고 지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외무성은 7000만 달러, 대장성은 1600만 달러라는 결론을 각각 내놓았다. 일본 정부는 우편저금과 유가증권, 미지급 임금, 은급(恩給·연금) 등 식민지 지배 때의 법률관계를 전제로 한 돈은 계산에 넣었지만 강제동원에 대한 사죄나 배상은 포함하지 않았다.
모임 공동대표인 요시자와 후미토시(吉澤文壽) 니가타국제정보대 교수는 “오히라 관방장관이 외무성과 대장성에 청구권 규모를 계산해보라고 지시한 사실이나 계산 결과는 알려져 있었지만 산출 근거는 처음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한국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자의 대일 청구권이 살아있다는 판결을 이끈 최봉태 변호사는 “한국 대법원 판결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단서”라며 “일본 정부가 한일청구권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게 일본 측 문서로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일본이 최종적으로는 5억 달러를 지급했고 이 가운데 배상금이 포함돼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일본은 5억 달러를 배상금이 아니라 경협자금으로 지급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2005년 공개된 한국 측 한일회담 문서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에 남긴 재산이 한국에 갚아야 할 돈보다 많아 배상금은 지급할 수 없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번 문서 공개가 강제 징용자 등의 배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법원은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청구권이 모두 소멸됐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례를 바꾸기 위해서는 일본 측 문서가 추가로 공개돼 청구권협정의 성격이 명확하게 규명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 한일 청구권협정 ::
1965년 한일 양국이 국교 정상화를 위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의 부속협정. 1조에서 ‘양국의 모든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돼 있다. 일본은 이 조항을 들어 청구권의 소멸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한국 대법원은 2005년 “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양국 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따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징용 피해자들의 소송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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