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버스 인질극, 홍콩 일가족 5명 안타까운 사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25일 03시 00분


코멘트

아빠가 몸 던져 총탄 막았건만… 부인만 무사, 두 딸 숨지고 아들 중상… 홍콩-中 충격

“나도 함께 남편과 죽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 때문에….”

23일 밤 경찰에게 구출된 직후 량진룽(梁錦榮·58) 씨의 부인으로만 알려진 중년 여자는 TV 카메라 앞에서 넋이 나간 듯 흐느꼈다. 그녀는 “남편이 나를 살리려 몸으로 총탄을 막고 숨졌다. 누군가는 살아남아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면서…”라며 절규했다.

이날 비리로 해직된 필리핀의 전직 경찰관이 관광버스에 탄 홍콩인 관광단을 상대로 무장 인질극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24일 오후 현재 9명(범인 포함)이 사망했고 부상자 7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 홍콩의 6가족 21명이 20일 흥겹게 출발한 여름 여행은 대량 참사로 막을 내렸다.

남편 량 씨가 목숨으로 지키려 했던 가족은 안타깝게도 참사를 피하지 못했다. 량 씨와 딸 2명은 현장에서 피살됐다. 또 그의 아들은 머리에 총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한 가족 5명이 떠난 여행길에서 1명만 온전히 살아남았다.

또 다른 사연도 있다. 범인은 인질극 도중 4세, 10세의 어린이와 그들의 엄마 쩡치리(曾綺麗·40) 씨를 풀어줬다. 쩡 씨는 버스에서 빠져나오면서 11세의 왕정르(汪正日) 군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범인에게 왕 군이 친척 아이라고 함께 풀어달라고 애걸했고 왕 군은 석방됐다. 하지만 버스에 남았던 왕 군의 부모는 모두 피살됐다. 왕 군의 누나(15)도 다리에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고 있다.

이날 사건은 홍콩과 중국 대륙에 큰 충격을 안겼다. 필리핀도 외교 분쟁으로 비화하고 홍콩 등지의 자국민에게 피해가 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홍콩의 도널드 창 행정장관은 23일 밤 긴급 기자회견에서 “사건이 해결된 방식, 특히 결과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말했다. 창 행정장관은 사건 당일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과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홍콩 언론도 “필리핀 경찰의 구출작전이 전혀 전문적이지 않았고 여러 차례 구출 기회를 놓쳤다”며 “무리한 작전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냈다”고 성토했다.

홍콩에는 24일 조기가 게양됐고 야후 등 홍콩 주요 포털 사이트는 흑백으로 홈페이지를 처리해 희생자를 애도했다. 홍콩 정부는 사건 당일 필리핀 여행등급을 ‘블랙’으로 올려 여행을 전면 금지했고 희생자 가족과 의료진을 태운 특별기 2대를 마닐라로 급파했다.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도 필리핀 정부에 경위 설명을 요구했다.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 산하 런민왕 등 중국 언론도 필리핀 경찰의 어설픈 대응을 비난했다.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진압부대의 장비와 훈련이 부족했고, 구출방법에도 실수가 있었다”며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