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덴마크 공영방송 DR은 자국 정부가 1960, 70년대 그린란드 원주민인 이누이트족 여성 4500여 명을 상대로 자궁 내 피임 기구를 강제 삽입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그린란드 여성은 약 9000명. 전 여성의 절반을 실험실 생쥐 취급하며 산아 제한에 나선 것이다. 피해자 중에는 초경조차 안 한 12세 소녀도 있었다.
덴마크 사회가 발칵 뒤집혔지만 정부는 진상 조사를 이유로 사과를 차일피일 미뤘다. 2019년부터 집권 중인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는 첫 보도 후 3년 3개월이 흐른 지난해 8월 27일에야 사과했다.
이 사과는 100% 진심일까. 총리의 사과 당일 덴마크 외교부는 최소 3명의 미국인이 그린란드에서 친(親)미국 여론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마크 스트로 주덴마크 미국 대사대리를 초치했다. 이에 뉴욕타임스(NYT) 등은 사과의 또 다른 이유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인 2019년 8월 처음 그린란드 구매 의사를 밝혔다. 지난해 1월 재집권 후 군사 개입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노골적으로 병합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미국에 맞서려면 그린란드인의 분노부터 달래야 하니 뒤늦게 덴마크 정부가 사과했다는 의미다.
세계 곳곳에서 주권 개입을 일삼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만 이를 문제 삼는 덴마크 또한 그린란드에 적지 않은 과오가 있다. 그린란드가 태초부터 덴마크 땅이었던 것도 아니고 양측의 인종, 문화, 역사적 동질성도 거의 없다.
덴마크는 1814년 노르웨이로부터 그린란드를 넘겨받았다. 1953년 본토에 편입시킨 후 ‘동화’라는 명목으로 강제 덴마크어 교육, 덴마크 가정으로의 어린이 강제 입양 등을 일삼았다. 강제 피임 수술 또한 1990년대까지 행해졌다. 그린란드가 2009년 자치권을 획득하지 않았다면 이누이트족 탄압 사실이 아직 묻혀 있을지 모른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그린란드인의 본심 또한 “미국도 덴마크도 싫다. 독립만 원한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을 악마화하는 것이 잠깐의 기분 전환은 될 수 있다. 그러나 덴마크와 그린란드 모두의 안보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구 약 600만 명의 덴마크, 약 5만7000명의 그린란드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안보 우산에 의존한다. 덴마크 정규군은 고작 2만1000여 명. 대규모 지상전 수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덴마크 본토를 점령했을 때 그린란드를 지킨 주체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합병 의사를 철회한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12일 “트럼프는 서둘러야 한다. 주민 투표를 실시하면 그린란드인 전체가 러시아 편입에 찬성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덴마크 입장에선 ‘미국이 머뭇대면 우리가 그린란드를 먹겠다’는 러시아, 차이나 머니로 그린란드에 공항 등 각종 인프라를 건설해 주겠다는 중국이 어쩌면 트럼프 대통령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즉, 그린란드를 둘러싼 논란은 ‘안보는 자강(自强)’이라는 평범하지만 냉혹한 교훈만 일깨워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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