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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10월 13일 02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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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89(Herbst 89).’ 올해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기념행사의 슬로건이다. 1989년 11월 9일, 옛 동독인들은 가을 찬바람을 맞으며 거리에 나서 ‘철의 장막’으로 불린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동독은 어떻게 변했을까. 동독 곳곳을 돌아보고 동독인을 만나 들은 얘기를 세 차례로 나눠 전한다.》
▼‘굴뚝’ 하나 없는 발트해 가는 길
공장 안들어오자 정부 “에너지 산업 육성”
끝없이 황량한 벌판엔 전력 생산용 풍차만▼
4일프랑스 파리에서 탄 비행기는 베를린 쇠네펠트 공항에 내렸다. 옛 동독이 사용했던 쇠네펠트 공항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렌터카 업체 ‘유럽 카’에 들렀을 때 직원은 “서베를린 지역 테겔 공항이 현재는 주요 공항이지만 국제공항으로선 협소해 2012년 폐쇄될 예정이고 쇠네펠트가 베를린의 새 관문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베를린이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변변한 국제공항 하나 아직 없었던 것이다.
차를 빌려 동북쪽으로 향했다.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를 지나 발트 해로 향했다. 공장 굴뚝 하나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전력 생산용 풍차만이 벌판을 지나는 바람을 잡고 서 있었다.
나중에 베를린에서 만난 옛 동독 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의 기자 페터 키르샤이 씨에게 궁금했던 그 풍차에 대해 물었을 때 “동독 지역에 어떻게 해도 공장이 들어서지 않자 정부는 재생에너지 산업을 키운다는 아이디어를 냈다”며 “그러나 풍차가 신성장동력으로선 턱없이 부족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발트 해변의 뤼겐 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토마스 만 등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 유명한 휴양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통일 후 동독 지역에서 성황을 누리는 몇 안 되는 관광지다. 1998년 해변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400m 길이의 공중다리가 옛 사진에 따라 복원되고 그 끝에 아름다운 젤린 해변 호텔이 들어섰다. 관광객 케르스틴 뮐러 씨는 “뤼겐 섬은 옛 동독 시절에도 인기가 높아 이곳에 숙박을 신청하면 차례가 오기까지 무려 10년을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튿날인 5일 옛 동서독 국경지대에 위치한 엘베 강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 슈나켄부르크라는 작은 마을을 입력했는데 찻길은 엉뚱하게 강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강가에 차 서너 대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작은 페리(ferry)가 기다리고 있었다. 페리 선장 잉고 숄츠 씨는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는 강 한가운데가 국경선이어서 건널 수 없었다. 1991년부터 페리를 운항하며 자유롭게 동서독을 건너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서는 한 무더기의 새가 하늘을 날았다. 독일 환경단체 ‘분트(BUND)’는 통일 후 엘베 강 국경지대가 지닌 환경적 잠재력을 재빨리 인식하고 이곳에 들어왔다.
6일 렌첸에 있는 분트 사무실을 찾았을 때 에카르트 크뤼거 씨는 “20년 전만 해도 엘베 강가에 다가서면 악취가 풍겼다”며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1000여 종의 새가 서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수자네 게르스트네 씨가 “그야 통일이 되고 나서 동독의 옛 공장들이 문을 닫고 더는 공장이 들어서지 않으니까 그렇지”라고 비꼬았다. 크뤼거 씨는 서독 출신이고, 게르스트네 씨는 동독 출신이다.
78일엔 베를린을 돌았다. 통일 이후 이곳은 유럽 최대의 공사판으로 변했다. 장벽이 있던 포츠담 광장이 상전벽해 한 것을 비롯해 ‘1989년부터 현재까지 베를린의 신(新)건축’이라는 책이 하나 나올 만큼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옛 동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도 세련된 거리로 변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동쪽으로 바르샤바 거리, 카를 마르크스 거리 같은 곳만 들어가 봐도 서베를린에 비해 현저히 낙후된 동베를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서베를린인 20%는 동베를린 지역으로 가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다.
동서 베를린 사람들 간의 심리적 거리만큼이나 동베를린 사람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도 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 동독을 탈출해 서독에 정착한 코리나 베른하르트 씨는 “서베를린의 대표적 번화가 쿠담(쿠르퓌르스텐담의 약칭) 거리의 백화점 ‘카데베’에 옛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에서 일했던 사람이 근무한다”며 “슈타지에 시달린 경험 때문에 지금도 그 백화점에 가는 것은 꺼림칙하다”고 말했다.
베를린 장벽에는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아예 ‘이스트 갤러리’라는 고유명사까지 붙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벽화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에리히 호네커가 키스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중년 남자 둘이 키스하는, 징그럽기 그지없는(?) 이 그림은 공산주의 세계에서 가장 관료적이었던 두 사람, 그리하여 위기가 자기에게 찾아오는지도 몰랐던 두 사람의 닭살 돋는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7일은 마침 동독 건국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20년 전 이날 고르바초프는 동독을 방문해 기자들에게 “늦게 오는 자, 삶이 고달프기 마련”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고르바초프는 (개혁에) 빨리 왔고, 호네커는 늦게 온 셈이다.
▼민주화 시위 촉발 라이프치히
9일 베를린을 떠나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20년 전 니콜라이 교회 월요기도회 후 시작된 시위가 이날 7만 명으로 확대된 날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날 니콜라이 교회에서 열리는 예배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가 옆에 선 남자와 얘기를 나눴다. 라이프치히 출신인 그는 “당시 폴란드에 있어서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그게 아쉬워서 10주년 때도 여기 왔고 20주년 때도 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교회 앞에는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려 있어서 중간에 그와 헤어진 뒤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예배가 끝난 후 20년 전 그날처럼 사람들은 게반트하우스 앞 아우구스투스 광장으로 향했다. 20년 전 시위 장면이 영상으로 재현됐다. ‘우리는 떠나고 싶다(Wir wollen aus)’는 구호가 어느 순간 ‘우리는 여기 남아 있겠다(Wir bleiben hier)’로 바뀌었다.
1989년 여름 수만 명의 동독인이 헝가리 체코 폴란드를 통해 서방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진짜 동독의 위기는 시위대가, 떠날 자유에 만족하지 않고 남아서 개혁을 요구하기로 했을 때 발생했다.
아우구스투스 광장에는 약 10만 명이 모였다. 라이프치히 인근 도시 에르푸르트에서 왔다는 헹켈 뮐러 씨는 ‘에르푸르트로부터의 감사(Dank von Erfurt)’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20년 전 이날 라이프치히 시민의 용기가 없었다면 에르푸르트는 아직 슈타지의 감시하에 살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노면 전찻길에서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카추샤’ 멜로디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러시아 민요 ‘바람이 불어오네’의 비장한 가락에 맞춰 고단한 동독인의 삶을 형상화한 모델들이 멈춰버린 구식 전차 앞에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한 노부인은 옛 동독 시절에 대한 향수와 공포가 교차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 앞을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10일 드레스덴을 거쳐 베를린으로 올라왔다. 엘베 강가 드레스덴은 동독 지역, 아니 독일 전체를 통틀어 볼만한 문화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이곳은 통일 이후 정부의 지원으로 옛 문화도시의 명성을 되찾고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이날도 드레스덴을 찾았다. 그러나 드레스덴의 뒷골목은 관광객이 보는 곳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많은 도로는 아직도 동독 시절의 포장되지 않은 돌길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자동차는 그 위에서 시속 50km 이상의 속력을 내기 어려웠다.
많은 동독인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그러나 그들은 20년 전 얻었던 그 자유의 소중함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베를린으로 올라오는 길에 라이프치히 호텔에서 본 안데르센의 글이 생각났다. “단지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햇빛, 자유, 그리고 작은 꽃 한 송이가 인간에겐 필요하다.”
베를린=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비밀경찰 출신이 근무하는 백화점 안가고
서베를린인 20% “동베를린에 가본적 없다”▼
20년전 “떠나고 싶다”는 “여기 남아있겠다”로
여전히 고단한 삶이지만 자유의 소중함 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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