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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8월 15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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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문양에 “죽음의 개혁” 자극적 문구 동원
[1] 우파의 격렬 반대 14일 오전 미국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 주 애넌데일 시.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차량들에 허리춤에 큰 팻말을 매단 남자가 다가선다. 운전자들이 ‘홈리스겠지…’ 하고 생각하며 동전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남자는 빠른 손동작으로 차들의 열린 창문 속으로 전단을 밀어 넣는다. 그러곤 “오바마가 헬스케어 시스템을 망치는 걸 용납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전단엔 오바마와 히틀러, 스탈린을 나란히 세운 자극적인 사진이 들어 있다.
일부 우파 정치인들은 반대론에 불을 붙이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해 대선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는 “민주당 개혁안이 통과되면 (국영 보험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 차도가 없는 병든 노인들은 사실상 강제로 치료가 중단되고, 나의 막내아들(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아기)도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자극적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죽음의 위원회(death panel)’를 만들려 한다고 낙인찍었다.
우파 정치인과 논객들은 또 “오바마 개혁안은 ‘(사회주의적) 의료서비스 배급제’”라며 “배급제의 가장 큰 희생양은 병들고 늙은 사람들이 될 것이며, 사회의 가장 비생산적인 구성원들은 (건강보험 통제권을 쥐게 될) 정부 관료들에 의해 버림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일부 공화당 정치인들은 “오바마 개혁안대로 되면 낙태도 보험으로 처리될 것”이라며 보수층을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민주당 입법안에는 그런 조항이 없다. 상당수 주장은 사실무근이다.
“의료 혜택 축소-질 저하” 불안에 떨어
[2] 노령층-중산층 우려 확산 미국의 건보체계는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4500만∼4900만 명이 보험이 없어 병원에 못 간다. 무보험자가 구급차 신세를 지고 응급실에 실려 가면 1만 달러가 넘는 고지서가 날아든다. 가끔 무료 진료 행사가 열리면 수천 명이 전날 밤부터 줄을 선다. “충치를 견디며 몇 달 기다리다 한꺼번에 이를 다섯 개 뺐다”는 식의 사연이 흔히 들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7명꼴로 건보 시스템의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답한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오바마 개혁안이 자신의 가족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대답은 10명 중 3명에 불과하다. 찬반론 분포는 사회·경제적 계층별로 차이가 난다. 이미 메디케어(노령자를 위한 공영보험)를 통해 부족하나마 보험 혜택을 받고 있는 노령층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최근 타운홀 미팅에서 한 할머니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앞으로는 관리들이 나 같은 메디케어 대상자들을 방문해서 ‘어떻게 죽게 되길 바라느냐’고 물어볼 거라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펄쩍 뛰었지만 ‘죽음의 위원회’ 같은 선동문구와 맞물려 우려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현재 민주당 개혁안은 상하원의 입법안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재원 마련을 위해 연 소득 50만 달러 이상 소득자에게 추가로 세금을 물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고소득자들은 세금이 늘어나는 것도 싫지만 건보개혁이 의료서비스의 질을 하향 평준화시킬까 봐 우려하고 있다.
보험료를 내주는 든든한 직장을 갖고 있는 중산층은 개혁 취지엔 공감하면서도 미지근한 반응이다. 중산층이 바라는 것은 의료수가 인하와 서비스 개선인데 현재 진행되는 걸로 봐선 무보험층 구제 이외엔 별로 달라질 게 없을 것 같다는 반응이다.
재정적자 확대, 대형 금융기관에 대한 구제금융, 줄기세포 연구 지원 등의 정책에 회의적 시각을 가져온 보수층이 건보 문제를 계기로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블루칼라 백인남성들 오바마에 등돌려
[3] 미소짓는 공화당 빌 클린턴 정부의 건보 개혁안이 의회 상임위도 통과하지 못한 채 좌절된 다음 해인 1994년 총선에서 공화당은 대승을 거두고 다수당으로 복귀했다. 공화당 전략가들은 “이번에도 ‘분노한 백인 남성’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대선 때 이탈했던 50세 이상의 블루칼라 백인 남성들이 오바마 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전통적으로 ‘작은 정부’와 ‘자율, 탈규제’를 신봉해 온 백인 보수층은 ‘의료보험의 관영(官營)화’를 우려하고 있다. 개혁안은 ‘공영조합을 설립하여 사보험 업체와의 경쟁을 유도해 서비스를 향상시킨다’고 되어 있는데 공화당은 “국가가 세금으로 값싼 보험서비스를 제공하면 결국 민영 보험업체들은 시장에서 퇴출되고 공무원들이 국민의 건강권을 좌지우지하는 관영 체제가 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제약사-병원 대대적 TV광고로 맞불
[4] 찬성론자의 반격 13일 미국 12개 주에서 ‘개혁이 당신에게 의미하는 것’이란 제목의 30초짜리 TV 광고가 동시에 시작됐다. 1200만 달러의 광고비가 드는 대형 광고 캠페인은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위한 미국인들의 모임’이란 연합체가 주도하는데 제약업계와 의학협회, 병원연맹 등이 적극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의료시스템에서 핵심 역할을 하며, 과거엔 건보개혁의 발목을 잡곤 했던 제약업계 등이 개혁지지 캠페인에 동참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에겐 청신호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