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이 그랬어요” 백인주부 납치 자작극서 재연

  • 입력 2009년 6월 3일 02시 57분


“오바마시대도…” 흑인사회 발끈

“흑인이 그랬어요(Black man did it).”

어떤 나쁜 행동이 저질러졌을 때 그 공동체 구성원의 상당수가 ‘보나 마나 ○○ 짓이겠지’라고 특정인이나 특정 그룹을 점찍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인종 차별이 심하던 시절, 미국의 백인사회에선 ‘흑인’이 그런 대상이었다. 범죄가 발생하면 대뜸 흑인 소행일 것이라고 추정해 버리는 백인이 많았다. 나쁜 일을 저질러놓고 불특정 다수 흑인에게 덮어씌우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대가 열리면서 그런 선입견은 사라질 것으로 기대됐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최근 미국 사회는 한 백인 주부의 납치 자작극에서 재연된 ‘Black man did it’ 파문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필라델피아에 사는 보니 스위튼이라는 38세 여성이 지난달 27일 “두 명의 흑인 남자에게 아홉 살 난 딸과 함께 납치됐다”는 긴급 구조요청 전화를 한 뒤 사라졌다. 경찰은 유괴사건 대응 경보를 발령하고 대대적 수색에 나섰다. ‘흑인 괴한에 의한 백인 모녀 납치사건’은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모녀는 디즈니랜드 호텔에서 멀쩡하게 발견됐다. 거액을 횡령한 뒤 잠적하면서 거짓 납치신고를 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흑인사회는 발끈했다.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들은 “오바마 시대 개막과 함께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도 사라지길 바랐는데…”라며 탄식하고 있다. 납치 자작극은 지난주 뉴욕 할렘가에서 발생한 흑인 경찰 피살 사건과 겹쳐 파장이 커졌다. 자신의 차를 턴 사람을 총을 들고 추격하던 사복차림의 흑인 경찰이 순찰 중이던 다른 경찰의 총에 숨진 것.

‘흑인은 위험하다’는 선입견은 오바마 대통령의 소년시절을 아프게 한 주제였다. 자신을 키워준 백인 외할머니가 “길에서 흑인 남자가 다가와서 너무 무서웠다”고 고백했다는 걸 전해들은 소년 오바마는 “백인들에게 비치는 흑인의 이미지를 깨닫고 심각한 방황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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