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세계화 수혜국 중국의 민족주의 과잉

  • 입력 2008년 5월 7일 02시 54분


딸아이는 칭다오에 사는 중국인 강사에게 전화로 중국어를 배운다. 1년이 돼가다 보니 중국어도 제법 늘었지만 중국 관습에도 익숙하다. 춘제(春節·중국 설날)나 요즘 같은 노동절 연휴에는 중국어 교습도 잠시 방학에 들어간다. 이 중국어 강사는 한국의 중국어학원에 취업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한국 실정에 익숙해지면서 학원이 폭리를 취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제안했다. 학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수업을 받으면 수강료를 절반으로 해주겠다고 말이다. 수강생 계산법상 거절할 이유가 없다. 우리 집안에서 생생하게 벌어지고 있는 ‘세계화’의 한 장면이다.

카르푸 불매운동은 양날의 칼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에서 기승을 부린다는 민족주의, 혹은 그들이 말하는 애국주의가 세계화시대에 어떤 함의를 갖는 것일까. 중국에선 지금 카르푸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파리에서 친(親)티베트 시위대에 의해 올림픽 성화가 꺼진 데 대한 보복의 성격이 짙다. 중국인들은 노동절인 1일을 ‘카르푸에 안 가는 날’로 결의했고 실제로 카르푸는 매장이 텅텅 비면서 매출이 폭락했다.

카르푸 불매운동은 ‘카르푸 대주주가 달라이 라마에게 자금을 지원해 주고 있으며, 프랑스는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고 있다’는 출처 불명의 문자메시지가 퍼지면서 시작됐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카르푸는 정말 달라이 라마에게 자금을 지원했을까. 카르푸 측은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달라이 라마에게 자금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미국산 쇠고기는 모두 광우병 쇠고기인 것처럼 몰아가는 인터넷 선동이 잘 먹히는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다.

둘째 카르푸 불매운동은 카르푸와 프랑스에 타격을 입힐 것인가. 이에 대해선 중국 정부가 사실상 답을 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중국 상무부는 중국 내 카르푸 매장에서 유통되는 상품의 95%가 중국산이며 전체 직원의 99%가 중국인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카르푸 불매운동의 주된 피해집단은 중국 제조업체와 카르푸의 중국인 직원 그리고 중국인 소비자들이라고 봐야 한다. 중국도 이미 세계화의 이방지대가 아님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001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은 현재 국내총생산(GDP) 세계 4위의 경제대국, 무역대국이며 외환보유액과 온실가스 배출량은 세계 1위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은 최근 원자재발(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 물가안정의 1등 공신이었다. 세계인이 사 쓰는 ‘값싼 물건’의 최대 공급국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직 언론인 세라 본지오르니는 중국 제품을 사지 않고 1년을 버틴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중국제 없이 살기(a year without made in china)’에서 중국 없는 미국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베이징 올림픽이 아니어도 이미 중국 없는 세계는 존재할 수 없게 됐다. 물론 세계 없는 중국도 상상할 수 없다.

성장과 정치적 무력감의 부조화 탓?

인류가 역사상 최고의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시대에, 이런 시대의 최대 수혜국이라 할 중국의 젊은이들이 드러내고 있는 ‘민족주의’는 제철을 모르고 핀 꽃처럼 생뚱맞다. 혹자는 중국 경제성장의 혜택을 톡톡히 받고 자란 1980년대 이후 이른바 바링허우(八零後)세대는 조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세대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일본 학자 다카하라 모토아키(高原基彰)는 중국 젊은 세대의 민족주의 경향을 ‘경제성장이라는 조증(躁症)과 비민주 체제에서 비롯된 정치적 무력감이라는 울증(鬱症)의 결합’이라고 본다. 필자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세계화의 수혜자가 민족주의에 경도되는 현상은 아무래도 역설이다. 하지만 이념문제 때문에 반쪽으로 치러진 모스크바 올림픽이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이제 되풀이될 수 없다. 베이징 올림픽을 후원하는 서방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베이징 올림픽과 서방 기업의 이해가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중국의 젊은이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중국이 개혁 개방을 지향하며 세계화의 흐름에 적극 동참했기 때문에 오늘의 자신들이 혜택을 누리게 됐다는 사실 말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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