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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29일 10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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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으로부터 27년 후인 1972년, 일본과 중국 양국은 국교를 맺었다. 전후에도 동서 냉전의 최전선에서 적대시해 온 두 나라였지만, 서로 외교를 전환시켰다. 그러한 결단을 내리게 한 배경은 무엇인가. 베이징(北京)에서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을 찾았다.
영하의 길거리를 걸어서, 중심가에서 조금 남쪽에 위치한 국가 체육 총국 시설을 방문했다. 1960년대에 중국 탁구의 에이스로서 이름을 떨쳤고, 지금은 중국 탁구 협회 주석으로 있는 쉬이인션(徐寅生) 씨를 만났다. 회의실에는 기념품들이 줄지어 있었다. 1971년 봄에 나고야(名古屋)에서 열린, 제31회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도 거기에 있었다.
그 대회야말로, 세계정세를 움직인 미국과 중국의 탁구 외교의 출발점이었다.
대회전부터 대회장인 아이치현(愛知縣) 체육관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멀어져 있던 중국이, 6년 만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쉬이(徐) 씨는 감독이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수상으로부터, 첫 번째 목적은 우호다, 시합은 둘째다고 지시를 받았다”며, 쉬이씨는 회상한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중일 우호의 촉매 역할을 떠맡아 일본을 방문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회장의 일각에서는 다른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중국 선수단 간부에게 미국 탁구 협회 임원이 말을 건넸다. “(중국은 대회가 끝난 뒤에 캐나다 등의 팀을 초대하는 것 같은데) 미국도 불러 주지 않겠느냐.”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쟁하고 있는 적국이었다. 진심에서 하는 소린가라고 반신반의했지만, 간부는 이 말을 베이징(北京) 에 전했다.
마오쩌둥(毛澤東) 공산당 주석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런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외무성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진언했고 마오쩌둥도 동의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이면 미국 팀은 귀국한다. 마오쩌둥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여느 때처럼 수면제를 마시고 자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수간호사에게 “미국 팀을 부르라”고 했다. 그러나 수간호사는 이전부터 “수면제를 마신 후에 내가 한 말은 무시하도록 하라”는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명령에도 수간호사가 움직이지 않자, 마오쩌둥은 당황했다. “빨리 알리지 않으면 미국 팀이 돌아가 버린다.”
4월 7일, 나고야 발 뉴스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중국 선수단이 미국 팀의 초청을 발표했던 것이다. 이틀 후 미국 팀은 홍콩을 경유해서 베이징(北京)으로 향했다. 키신저-미 대통령 보좌관의 은밀한 베이징 방문은 이로부터 3개월 후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닉슨 대통령의 방중으로 이어진다.
“중일 관계도, 중미 관계도, 나고야가 계기가 되었다”고, 쉬이씨는 말한다.
소련•베트남 순회 / 미국과 중국의 의도가 일치
물론,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단번에 바뀐 것은 아니다. 공통의 이익이 서서히 양국을 서로 가까이 하게 했다.
미국과 중국의 접근으로 중국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탁구 외교의 무대 뒷이야기를 쓴 인민일보(人民日報) 해외 판의 부 총편집인 치엔치안(銭江)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상 이상의 결과였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강해, 우리와 일치했다. 대만 문제도 빨리 해결할 수 없지만, 심각한 상황에 빠질 일이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미국도 소련을 두려워해, 미국과 협력해서 소련에 대항한다는 마오쩌둥 주석의 생각이 굳어졌다.”
당시 , 중국도 소련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중소 대립은 1950년대부터 서서히 깊어졌지만, 1969년 중소 국경의 우스리강의 다만스키섬(珍宝島)에서 양국군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 중국은 전쟁도 각오했었다. 국경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동시키고, 베이징(北京)을 시작으로 각지에 방공호를 팠다. 긴 국경선을 공격으로부터 대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남쪽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때라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다. 북베트남에서의 장기 지원은 부담이 컸다.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교섭할 좋은 타이밍을 찾기가 어려웠다”라고 치엔(銭) 씨는 말한다. 베트남 전쟁이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반전 운동에 고민하고 있던 미 정권과 생각이 같았던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접근할 것인가. 그 계기를 만든 것이 나고야였다.
등 떠밀린 일본 / 3개월이 안 돼서 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