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고도성장’단원에서 간략하게
중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쿄 서적(東京書籍) 판에서는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체결 후에 일본이 국제 사회에 복귀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5줄 정도로 기술한다.
《1955년경부터 냉전의 긴장이 조금씩 완화되는 가운데, 평화 조약을 맺지 않은 소련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1956년 일소 공동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같은 해, 일본은 소련의 지지도 얻어 국제 연합에 가맹하여 국제 사회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본문이 아닌 주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일본은 구나시리섬(国後島), 에토로후섬(択捉島), 하보마이제도(歯舞諸島), 시코탄섬(色丹島)(북방 영토)은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했습니다만, 소련이 응하지 않은 관계로 평화 조약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소련이 해체된 후에도 러시아와의 사이에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교과서에서도 거의 같은 입장이다. 와타나베 노리오(渡辺能理夫) 사회 편집부장은 “북방 영토 문제는 반드시 검정에서 체크된다. 오랜 세월에 걸친 국가의 검정으로 대동소이한 표기가 되었다”라고 한다.
한편, 한국,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해서는 ‘고도 경제 성장 속의 일본’이라는 단원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3줄로 정리한다. 《일본은 1965년, 한국과 한일 기본 조약을 맺고, 한국 정부를 한반도에 있는 단 하나의 합법적인 정부로서 승인했습니다.》
계속해서 일중 관계에 대해서는 4줄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본문이 아닌 주에서 ‘일중 평화 조약’제1조를 게재하고 있다.
《관계가 끊어졌던 중국과는 1972년 일중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국교를 정상화했습니다. 1978년에는 일중 평화 우호 조약을 맺고 그 후, 중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함께 관계도 한층 강화되어, 교류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오쿠보 마키(大久保真紀)
● 한국 - 5억 달러의 자금 제공에 관한 기술이 없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 취급하고 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한 것을 설명한 후,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대해 4줄 정도로 적는다.
《박정희 정부는 민주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중립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숙제로서 남아 있던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한일 협정을 체결(후략)》
일본이 한국에 유상 및 무상으로 합계 5억 달러의 자금을 제공한 사실과, 그것이 한국 경제 발전으로 이어진 것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고 있다.
국사 편찬 위원회 김득중(金得中) 박사는 “교과서는 분량이 한정되어 있어, 우선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자세한 사항은 교사가 설명하도록 하였다”고 말한다.
한편, 고등학교의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국에서 전개된 국교 정상화 반대 운동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 실현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고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사과와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억누르고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1965).》
김 박사는 반대 운동을 채택한 것에 대해서 “격렬한 반대에 대한 고려도 없이,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일본과 국교가 맺어진 점을 강조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보충 설명으로, “한일 관계 자체를 다루었다기 보다는,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나타난 박 정권의 비민주적인 성격을 분명히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일중 국교에 대해서는 국사 ‘국제 정세의 변화’란 항목에서 1줄만 쓰고 있다. 한중 국교 수립에 대해서는 사진만이 게재되고 설명은 없다.
일소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는 국사와 세계사를 취급하는 『사회 2』 과목의 대다수의 교과서에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쿠라이 이즈미(桜井泉)
● 중국 – 미중 관계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일중 관계는 간단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