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그 티베트 청년은 지금

  • 입력 2008년 4월 16일 03시 01분


티엔을 만난 것은 11년 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연수할 때였다. 그는 인도에서 공부하러 미국에 왔지만 모국은 티베트이다.

특이하게도 그는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라면 질색을 했다. 값이 더 비싸도 중국산이 아닌 신발을 사러 쇼핑몰을 헤매고 다녔다. 가난한 학생이 값싼 중국 제품에 왜 그렇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지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웬만큼 친해진 뒤였다.

“사실은… 우리 부모는 1987년 10월 티베트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중국 군인들에게 살해됐어요. 그때 몇백 명이 무참하게 죽었죠. 어린 나만 겨우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려 인도로 탈출했고, 그곳에서 지내다 인도에 봉사활동을 온 버클리대 여학생을 알게 됐어요. 그의 도움으로 미국에 온 거예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그의 비극적인 사연에 말문이 막혔다. 한국도 망국의 역사가 있기에 그의 응어리진 한을 헤아릴 수 있었다. 다만 그의 집안을 풍비박산 낸 유혈사태는 그땐 생소하게 들렸다.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7년 내겐 그런 외신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지 않았나 싶다.

티엔에 대한 연민은 얼마 안 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 약 11만 명을 ‘전시격리캠프(War Relocation Camps)’에 강제 수용한 것을 상기하는 한 행사에서 그에게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미국 연사들은 미 정부의 과오를 진지하게 사과했고, 일본인 참석자들은 짐짓 ‘과거를 용서한다’면서도 ‘다시는 그런 인권 유린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누구도 일본이 한국 등을 침략한 역사는 언급하지 않았다.

가해자인 일본이 피해자로 둔갑한 게 기가 막혔지만 티엔은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그런 발언에 공감하는 듯했다. 심지어 다이코(太鼓) 시범을 한 일본 문화단원들이 청중에게 무대 위로 올라와 북을 쳐볼 것을 권하자 제일 먼저 뛰어올라가 열정적으로 북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서운한 마음에 행사가 끝난 뒤 따졌다. 중국에 나라를 빼앗긴 티베트인으로서 어떻게 침략국인 일본을 동정할 수 있느냐고. 티엔은 난감해했다. “미안…. 일본이 한국에 그런 고통을 준 걸 알지 못해서….”

피장파장이었다. 내 민족의 고통을 알아주기 바라면서 다른 민족의 고통을 모르기는 서로 마찬가지였으니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최근 국제사회에선 티베트 사태와 관련해 ‘중국 때리기’가 한창이다. 중국의 인권탄압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의 이면엔 티베트에 대한 동정 외에 급부상하는 중국을 차제에 견제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티베트 지배 자체를 정면으로 문제 삼기란 국제적인 역학관계에 비춰볼 때 쉬운 일이 아니다. 달라이 라마가 딱하게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치이지 독립이 아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요즘 티엔은 동포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목이 터져라 외칠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어쩌면 평생 ‘메이드 인 차이나’를 외면한 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되찾은 조국에서 두 발 뻗고 살며 중국 제품에 거부감을 안 느껴도 되는 나는 그가 생각날 때마다 안쓰러움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한기흥 국제부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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