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亞太전쟁, 각국 교과서 비교

  • 입력 2008년 1월 29일 16시 25분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불타고 있는 미국 군함. 일본의 도쿄 서적(東京書籍), 중국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학생용 교과서에 게재되어 있다(PPS 통신사 제공)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불타고 있는 미국 군함. 일본의 도쿄 서적(東京書籍), 중국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학생용 교과서에 게재되어 있다(PPS 통신사 제공)
《 아시아 태평양 전쟁은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폭을 투하하면서, 인류를 ‘핵의 시대’로 몰고 갔다. 동시에 제국 일본의 패배는 아시아에 대변동을 가져 왔다. 동아시아의 중학생용 역사 교과서에서는 어디에 역점을 두고 설명하는지 알아보자. 》

●일본 - 국민들과 아시아에서의 희생은 간략하게

일본 중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새로운 사회 역사』(도쿄 서적(東京書籍))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아시아’라는 제목으로 6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유럽에서의 전쟁을 설명한 후에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쟁’과 ‘전쟁의 종결’에 대해 각 2페이지를 할애하였다.

‘아시아, 태평양에서의 전쟁’에서는 학도병 동원과 공습, 피난 등을 다루면서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의 피해 상황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지만, 합해서 1페이지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다.

《일본이 침략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전쟁터에서 죽거나 노동에 끌려나오는 등,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일반인이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에 끌려 와서 자신의 의사와는 반대로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과 중국인 등도 있었으며, 가혹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 등으로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동 출판사의 10년 전 교과서에서는, 공습에 고난을 받는 일본 국민의 전시 하의 생활에 대해 2페이지 정도로 기술하고, 강제 노동과 강제 연행, 일본군 위안부 등 아시아에서의 가해 행위를 약 3페이지에 걸쳐서 구체적으로 설명했지만, 그러한 상세한 기술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오키나와전(沖縄戦)에 대해서도 10년 전의 교과서에서는 “스파이 혐의라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 “집단 자결을 했다”등의 주민 피해에 대해 구체적인 기술이 있었지만, 현재는 “많은 희생자를 냈다”등의 표현으로 바뀌었다.

와타나베 노리오(渡辺能理夫) 사회 편집부장은 “학습 지도 요령이 바뀌어서 수업 시간이 줄어든 관계로, 내용을 엄선한 것과 좌우 양 페이지의 분량을 1시간 수업 분량으로 구성한 점이다. 그러나 시대적인 배경도 부정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1997년에 개정된 7개 사의 교과서는 모두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다. 그 이후 그 기술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발족되었다. 그리고 그 단체 등에서 주장하는 “기술이 너무 자학적이다”라는 비판의 영향을 받아 교과서 내용이 오늘날처럼 되었다.

오오쿠보 마키(大久保真紀)

●한국 - 광복군의 분투하는 모습을 2페이지에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대해서는 세계사 분야에 속하는 『사회 2』와, 한국사를 다루는 국정 교과서 『국사』 양쪽 다 가르치고 있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금성 출판의 『사회 2』에서는 제2차 대전 경과를, 독일의 폴란드 공격으로부터 원폭 투하에 이르기까지 2페이지에 걸쳐 그림과 사진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일본군, 인도차이나 침공’과 ‘일본의 진주만 기습’등의 항목을 두어 사실 관계를 적는다.

집필자가 취재에 응해 준 도서 출판 디딤돌의『사회 2』에서는 히로시마(広島)에서 피폭을 당한 중학생의 수기를 소개하고 있다. 김육훈(金陸勲) 태릉고교 교사는 “핵병기가 얼마나 무서운가 한국인은 잘 모른다. 침략한 나라도 침략 당한 나라에서도, 민중에게 전쟁이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을 가르치려 한다”고 집필 의도를 말했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중국에 있던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 의해 조직된 한국 광복군의 분투에 대해 2페이지에 걸쳐 기술하고 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함께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이 때, 한국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중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며, 멀리 인도와 미얀마(버마) 전선에까지 나아가 영국군과 함께 대일 전투에 참여하였다.》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적극적인 독립 전쟁은 여러 나라에 알려져, 세계 열강은 한국의 독립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모인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라고 기술하며 광복군의 투쟁이 독립에 기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허영란(許英蘭) 박사는 “ 대한 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가 전황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가는 둘째 치고, 식민지였던 조선이 전승국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우익들은 ‘일본이 미국에 진 것이지, 식민지 조선에 진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 전개하는데, 이에 대한 비판의 의미도 있다”고 했다.

사쿠라이 이즈미(桜井泉)

●중국 - 파시즘 국가와의 싸움 강조

중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학생용 교과서에서는, 일본의 대 미영(美英) 전쟁에 대해 『세계사』교과서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다루고 있다. 이 단원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세계 반 파시즘 전쟁의 승리’라는 두 개의 과로 구성되어, 14페이지에 달한다. 이 안에서 진주만 공격 등 일본에 관한 부분은 합계 2페이지 반이 할애된다. 다음과 같은 기술로 시작된다.

《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군은 대량의 비행기를 출동시켜, 선전 포고도 없이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에 공격을 개시했다. 다음 날, 미국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의 규모가 더 한층 확대되어, 세계 대부분의 지역과 사람들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혹한 피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일본 교과서와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다른 특징은, 제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전체주의) 국가 진영과 반파시즘 국가 진영의 싸움이라는 성격을 부여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파시즘 국가의 야만스러운 침략은 세계 인민의 광대한 분노를 일으켰다. 미국, 영국, 소련 등의 국가들이 공동의 적인 파시즘에 저항하기 위해 손을 잡게 되었다.》

《아시아와 태평양의 전장에서는 일본은 항복을 거부했다.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인민들은 일본 침략자에 대해 맹렬한 반격을 했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를 잘 아는 또완뤼총(段瑞總) 게이오대학 준교수는 “중국 정부는 항일 전쟁이 반파시즘 전쟁의 승리에 공헌하였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 향상으로 연결되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게재하여, 학생들 스스로가 사고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자이다, 라는 견해가 일본에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토 가즈오(佐藤和雄)

●대만 - 얄타 회담의 중요성을 지적

대만의 교과서에서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중국사와 세계사에서 다루고 있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남일서국(南一書局)의 『국민 중학∙ 사회』의 중국사 부분에서는 ‘중일 전쟁” 항목에서 1페이지를 할애하여, 진주만 공격으로부터 원폭 투하까지를 설명하고,《(중일 전쟁의)제2 단계는 (중국이) 연합군과 함께 싸웠다.》라고 평가한다.

중국으로서는 큰 의미를 가지는 사항으로서,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에 대해 사진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참가하지 않아 사정을 모르는 가운데, 소련과의 얄타 비밀 협정을 체결해, 중국의 권익을 팔아 버림으로써 중국에게 커다란 손해를 끼쳤다.》

세계사 부분에서는 2페이지에 걸친‘제2차 세계대전’항목 안에서, 진주만 기습이 《유럽과 아시아의 2 대 전장을 합류시켰다.》라며, 세계 지도 위에 미드웨이 해전 등의 주요한 사건을 싣고, 대전의 확대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도《얄타 회담은 전후 정세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대전을 총괄하며,《전쟁 규모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컸으며, 전 세계가 영향을 받았다. 수천만 명이 죽은 것 외에도 경제적인 손실은 헤아릴 수 없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국민당 정권 하의 “역사 과정 표준”에 근거한 교과서에서는 세계사에서 제2차 대전에 대해 약 11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었다. 일본 관련으로는 진주만 기습과 히로시마(広島)의 원폭 투하, 항복 조인식 등의 3장의 사진을 실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또한, 중국사에서는 “태평양전쟁 발생 후, 중국의 전장은 일본군 100만 병력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전력을 다해 대미 작전을 실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중국의 공헌은 연합국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요소로 작용 되었다”라며, 항일전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남일서국(南一書局)의 교과서 편집 지도 위원인 초우호이민(周恵民) 정치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수업 시간과도 관계가 있어, 전쟁 부분에 대한 기술은 상당히 적다. 많은 사람들이 대만에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오스트리아인 포로가 있었다는 것 등도 모른다”고 현재의 상황을 말했다.

다무라 히로쓰구(田村宏嗣)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