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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0월 28일 09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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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 원(孫文)의 혁명은 도쿄에서 시작되었다
| ◆ 신해혁명 (辛亥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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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北京)은 한 밤중부터 비가 내렸다.
전후 세대 첫 일본 수상이 갑자기 퇴진을 표명한 날 밤이다. 나는 천안문 가까이에 있는 호텔에 묵었다. 중국 중앙 TV에서, 일본의 후계 수상 후보에 대해 관심 있게 보도하는 것을 호텔 방에서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 중국과 일본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방송 마지막 무렵 사회자가 해설자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자, 한 학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경제의 상호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 지금 일본인들은 대두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만.”
심리적인 문제. 이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관계를 구축할 것인가라는 물음과 직결된다.
약 100년 전, 신해혁명 당시, 일본도 지금과는 다른 문맥이지만, 같은 물음을 안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일본인들은 어떠한 답을 찾아내려 했는가. 혁명과 관계가 깊은 일본인 2명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아시아가 구미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중국이 강국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은 일생을 그렇게 굳게 믿고 혁명가 쑨 원(孫文)을 지지했다. 도텐(滔天)에게 있어 ‘중국 대륙에서의 이권’이라든지, ‘일본의 팽창’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쑨 원(孫文)을 지지한 일본인들 중에는 중국에서의 이권을 고집하여 이후 우익으로 불리는 국가주의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도텐(滔天)은 달랐다.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도텐(滔天)에 대해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난징(南京)시에 있는 “난징 중국 근대사 유적지 박물관”에 가면 잘 알 수 있다. 신해혁명 후, 쑨 원(孫文)의 임시 대총통부로 사용된 건물에, 그의 집무실과 거실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쑨 원(孫文) 기념관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연간 200만 명을 넘는 관광객들이 대형 버스로 줄지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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