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역사인가 …정치 상황과 맞물려 중요성 증대

  • 입력 2007년 6월 8일 17시 13분


코멘트
제2차대전중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하는 한국 여성들.(2007.5.2 로이터)
제2차대전중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하는 한국 여성들.(2007.5.2 로이터)
▼ 편집자 알림 ▼

동아닷컴은 12일부터 일본의 아사히 신문과 함께 동아시아의 150년 근·현대사를 뒤흔든 10대 사건을 재조명하고, 한국 일본 중국 대만 각국의 역사 교과서는 이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는 연중기획 '역사는 살아 있다, 동아시아의 150년'을 연재합니다.

이 시리즈는 동아닷컴의 제휴사인 일본 최대 권위지 아사히 신문이 기획, 지난 5월 28일부터 아사히 신문 지면을 통해 연재되기 시작한 것으로 동아닷컴은 아사히 닷컴과 동시에 12일부터 아사히 신문측이 제공한 한글 번역기사 및 중국어 판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한국에서는 포괄적인 “과거의 청산”이 진행되고 있고, 대만에서는 새로운 정치 움직임이 역사를 둘러싼 논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역사 문제가 공산당 지배의 정통성에 영향을 주는 중국은, 과거 사건을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해 더한층 민감하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군사력에 의한 침략과 지배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제정된 현행 헌법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신 시리즈 “역사는 살아 있다 동아시아 150년”을 시작함에 즈음하여, 동아시아 각국에서의 ‘역사’ 인식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현 상황을 비롯해, 글로벌리제이션 속에서 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역사 교육의 최신 사정을 보고한다.》

■ 시리즈 소개

이 시리즈에서는 동아시아에서 근・현대의 서막이 된, 아편 전쟁(1840년)에서부터 냉전 종결까지를 대상으로, 10테마를 선택하여, 현재와의 연관성과 ‘교류와 연쇄’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재현합니다.

동시에, 각국의 역사 교과서를 비교하여, 역사에 관한 우리의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도 심도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중국, 공산당 정권의 존립 기반

전쟁을 둘러싼 역사 인식은 일본과 중국의 큰 불씨다. 한편, 중국의 경제와 사회가 크게 변화하면서, 국내에서도 공산당의 역사관에 대한 반론이 있다. 역사를 둘러싼 내외로부터의 압력에 공산당 정권은 대결과 타협으로 대응하고 있다.

“민족이 단결한(일본군과의) 항전에서 공산당이 중심 역할을 완수한 것을 전력을 다하여 선전하라”

재작년, 공산당이 전후 60주년 기념 활동 시에 내린 통지이다. 공산당은 때때로 이런 선전 활동을 한다. “침략과 봉건주의에 대항하여, 인민국가를 만들었다”는 근・현대사야말로 정권의 존립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 공적을 토대로 하여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선도한다는 것이 공산당의 입장이다. 근・현대의 역사 과정을 국민에게 철저히 숙지시키는 것이, 정권을 지키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시장 경제의 진전과 세대 교체 등으로 사람들의 의식은 다양화되었다. 사상과 보도의 통제 하에서도 학자나 기자들이 여러 문제에 관한 독자적인 의견을 발신하고 있다. 그 중, 작년에 주요지에 게재된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학자의 논문이 큰 문제가 되었다.

논문은 근대의 제2차 아편전쟁과 의화단사건에서, 중국 측도 지나친 대응과 국제법 위반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교과서에서는 이들을 완전히 정당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성에 근거하는 것이 현대화의 기본 정신이다”라며, 교과서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당국 측은 “열강의 침략 죄를 뒤집고, 역사적 사실을 거역했으며, 보도 선전 규율 을 거역했다”라고 비난하여, 논문이 실린 특집 코너를 페쇄했다. 편집자 등은 경질되었다.

학술 논문이라 하더라도 신문에 실리면, 정치 선전으로 간주한다는 자세이다. 당은 역사 교육을 비판하는 것은 간과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산당이 스스로 역사 인식을 조정하기도 한다. 최근, 항일 전쟁에서 국민당 군의 역할을 재검토한 것도 일례이다.

국민당은 오랜 세월 일본에 “저항하지 않았다”고 강조해 왔지만, 공적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추어 평가를 끌어 올렸다. 대만과의 통일을 목표로, 현재는 대만의 야당인 국민당을 끌어 들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의 수뇌부와 주요 미디어가 최근 들어, 평화롭게 발전한 일본의 전후사를 평가하고 있다. 일본 측의 요구도 감안하여, 대일 관계 안정을 위해 취한 조치로 여겨진다.

근・현대사에 있어서 공산당의 평가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라면, 정치적 전략을 고려하여 역사 인식을 더 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소가와 토모요시 五十川倫義)


▽한국, 민주화 거쳐서 과거 청산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이런 이름의 한국 정부 기관이 5월 2일, 일본과의 “합방조약”(1910년)에 서명한 당시 수상이었던 이완용 등 ‘친일파’ 자손들이 상속받은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한다는, 결정을 처음으로 내렸다.

“왜 지금인가” “자손도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일본에서 본다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친일파가 지탄을 받으면 통쾌하다”라는 국민 감정이 지금도 강하다.

일본의 통치를 받았던 시대만을 추궁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와, “KCIA”라 불렸던 정보 기관의 어두운 과거를 밝히는 “진상규명 발전위원회” 등,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은 전후의 독재 정권도 대상이 된다.

“담당 기관은 16이고, 그 중 13은 현 노무현 정부가 발족한 후 생겼다”고 당국자는 말한다.

과거를 단죄하는 시도는 1948년 한국 건국 당시에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직속의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그것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좌절한다. 강한 반일주의자였던 그도 건국 기초를 다지기 위해, 해방 전 일본 통치에 가담한 “친일파”의 지식과 실무 경험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 후의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일본과 국교를 수립한다. 냉전 하에서의 북한과의 적대 관계, 경제 발전의 필요, 독재, 민주화 탄압. 그러한 사정들이 역사의 청산을 막았다.

환경이 바뀐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민주화의 진행, 냉전도 막을 내렸고, 경제 성장으로 한국민은 여유와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김영삼 정권(1993~98년)이 선구가 된다.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주창하며, 일찌기 자신도 탄압을 당한 군사 정권을 처단했다. 조선시대 왕궁의 정면을 가로막은 곳에 일본이 지은 조선 총독부 건물을 해체한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체계적이지 못했다. 역사의 재검토를 본격적으로 ‘제도화’하여, 포괄적으로 검토에 임한 것이 현재의 노무현 정부이다.

이것은 노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정치적인 신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민주화 운동에 매진하여, 기득권 층과는 거리가 멀었다. “숨겨진 역사를 분명히 하여, 시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소화해 나가고 싶다”는 강한 자각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에 의한 스스로의 역사 청산이며 반성이다”.라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서민교 전문위원은 의의를 말했다. 일련의 역사 재검토 작업은 일본을 비롯한 다른 여러나라를 향한 것이 아니다. 다만, 과거 청산의 열기가 고양된 가운데에서 일어난,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 등이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킨 것은 틀림없다.

한국 내에는 보수 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인 도구다라는 경계도 있다.

동시에, 역사의 진실 찾기는 시대적인 필연이라는 견해가 많다. 노무현 정부가 아니더라도 역사청산은 이뤄졌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심화에 의한 시민의 존재감과 세대 교체가 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고스게 고이치 小菅幸一)

::친일파의 토지 몰수::

한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5월 2일, 한일합방조약에 조인한 당시 수상이었던 이완용 등, 친일파 9명의 자손이 상속한 토지 합계 약 25만 5천 평방미터를 국가 소유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토지에 대해 위원회는, 9명이 식민지 지배에 이르는 과정에서부터 독립할 때까지, 일본에 협력하거나 저항 운동을 탄압하는 등의 ‘매국 행위’에 의해 축재한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대만, 높아지는 대만인 의식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대만의 주권을 계승했다고 강조하지만, 대만에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대만을 일본에 할양한 것과 1947년 중화민국 정부에 의한 대만인 학살(2•28사건)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대만인에게 정식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대만 행정원(내각) 대륙 위원회의 젊은 관료는 단번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과의 대립관계는 이러한 과거사의 분노에서 기인한다. 더욱이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이 새삼 역사에 관심을 향하게 한다.

2000년에 국민당에서 정권교체 된 민진당은 대만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대만 본토화’와, 중국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탈 중국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대만 본연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자신은 대만인인가, 중국인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역사가 시야에 들어 오는 것이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대만인이라는 대답이 늘고, 중국인이라는 대답은 줄어 들고 있다. 작년 12월의 정치대학 선거연구센터의 조사에서는 대만인이 44%, 양쪽 모두가 45%에 비해, 중국인이라는 대답은 6%였다. 대만인 의식의 고양인 것이다.

리덩후인(李登輝)전 총통은 1999년에 중국과의 관계를 “특수한 나라와 나라와의 관계”라고 하는 “2 국론”을 제기하였다. 천수이볜(陳水扁)총통은 2002년에 “일변 일국론”(一辺一国論)으로, 중국과 대만은 각각 다른 나라라고 주장했다. 모두 중국의 맹반발을 불러왔다.

게다가, 대만 독립파는 “중화 민국”의 국호를 “대만국”, “대만 공화국”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는 ‘정명(이름을 바로한다)’운동을 전개하여, “대만”이라는 호칭 사용을 요구하고 있다. 당국도 이에 응하여, 올 2월에는 “중화우정”, “중국석유” 등의 공영 기업명을 “대만우정”, “대만석유”로 바꾸었다.

명칭의 재검토, 대만이라는 아이덴티티의 재검토는 역사의 재검토로 연결된다. 역사의 재검토는 역사 교육의 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민당 정권 시대는 언급조차 금기였던 2•28 탄압 사건에 대해서도,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28 사건은 대만 주권의 근원이다. 국민당에 의해서 왜곡되었던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라고 하는 것은, 2•28사건 기념기금회의 양젠롱(楊振隆)대표이다. 당국의 지원을 얻은 기금회는 2009년 개관을 목표로 “2•28국가기념관”을 건설 중이다.

대만의 장래를 결정하는 내년 봄의 총통 선거, 대만 독립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중국과의 관계 등, 대만 정치에서 “역사”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다무라 히로쯔구 田村宏嗣)

:: 2•28사건 ::

1947년, 중화민국 통치 하의 대만에서 일어난 주민과 정부의 충돌 사건이다. 2월 28일, 암거래 담배 단속에 항의하는 주민에게 군이 발포하여, 전 지역으로 항의가 확산되었다. 정부는 탄압으로 돌아 섰다. 그로 인한 사망자는 1•8만~2•8만명으로 추정된다. 대만인이 국민당과 대륙에서 온 중국인에게 반발하게 된 발단이 되었다.


▽일본, 개헌에 흔들리는 ‘전후’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각”을 내걸고, 미군 점령 하에서 만든 헌법은 바꿔야 한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수상 아래, 일본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자민당은 개헌 초안 전문에서 전쟁의 반성을 지웠다. 이것은 헌법9조를 바꾸어 군대 보유를 명기하고, 지금까지의 전후 입장과는 분명히 선을 그음으로써, 역사 문제는 이미 끝났다는 선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대 교체가 진행되어, 전쟁의 기억은 희미해져 간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중국과 한국의 맹반발을 불러 왔지만, 국내에서는 일정한 지지마저 모으게 되었다. 민주당 내에도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이번달 수상을 지지하는 자민당의원 43명이 “가치관 외교를 추진하는 의원회”를 만들었다. “자유•민주•인권•법의 지배”를 내걸고, 그러한 가치관에 맞지 않는 나라로서 중국을 지명했다. 한편, ‘기본 이념과 정치 철학’에서 양보할 수 없는 문제로, 야스쿠니 참배도 예를 들어 동지로서의 결속을 굳힌다고 말했다. 멤버로는 역사 교과서 문제 등에서 아베 씨와 보조를 같이한 의원들도 많다.

하지만, 현 정권의 위험한 자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마찰에서도 엿 볼 수 있다. 강제성을 “광의인가 협의인가”로 나눈 당초 수상의 견해에 대해, 구미에서도 미디어를 중심으로 강한 비판이 일어났다. 그 대부분이 유태인 학살을 예로 든 바와 같이, 비판의 진정한 의미는 “그 시대의 정치 지도자가 부(負)의 역사를 어떻게 보려 하는가”라는 세계 공통의 과제이다.

역사 문제는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끝내려 하여도,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는다.

(후쿠다 히로키 福田宏樹)

▷▷변화하는 역사교육, 한 중 대만 일본의 최근 상황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