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통해 명분 주장…과거 살인범 순교자화

  • 입력 2007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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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살해범(mass murderer) 중에는 살해 동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외부에 알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도 그랬다.

그는 미국 NBC방송에 살해 동기를 밝힌 동영상 사진 글을 보냈다. 충격적 사건으로 세간의 관심을 끈 뒤 언론 매체를 이용해 살해를 정당화하려는 수법은 과거 유너바머와 비슷하다. 조승희가 1999년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범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흔히 유너바머로 알려진 천재수학자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17년간 연쇄폭탄테러를 저지른 뒤 1995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를 협박해 장문의 선언서를 게재하도록 했다.

차이는 있다. 유너바머는 232개 항목과 32개 각주 형식으로 조목조목 자신의 주장을 폈다. 16세에 하버드대에 입학하고 26세에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된 천재 범죄자답게, 전체적으로는 왜곡됐지만 나름대로 정교하게 산업사회를 비판한 글이다.

반면 인터넷 세대인 조승희는 동영상과 사진을 위주로 해 복수영화의 한 장면을 연기하듯 메시지를 전달했다. 선언서의 손수제작물(UCC)판이라고나 할까.

조승희는 분노한 표정과 목소리로 “누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양쪽 귀까지 입이 찢기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또는 “벤츠 자동차로도 부족했어, 보드카와 코냑으로도 부족했어”라고 말하는 등 대구(對句)법까지 써 가며 할리우드 연기자 행세를 했다.

그러나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었다.

조승희가 과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다른 다중 살해범을 자신의 정신적 동지로 끌어들이는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조승희는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인 10대 소년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를 순교자라고 불렀다. 자신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는다’는 표현도 사용했다. 총기 난사에 알카에다적인 ‘자폭 순교자’ 이미지를 결합해 콜럼바인 사건의 계승자임을 자임한 것이다.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빌딩 폭파범 티모시 맥베이도 그랬다. 맥베이는 재판진술과 변호사 등을 통해 범죄의 동기는 1993년 텍사스 주 웨이코에서 연방정부가 다비드교도를 진압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맥베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미 연방수사국(FBI)의 방화와 총격으로 어린아이들이 무고하게 죽는 걸 목격하고 과도한 권한을 가진 연방정부에 분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광신자 집단인 다비드교도는 세뇌된 아이들을 사실상 인질로 붙잡고 있었다.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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