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기금-금식” 美 한인사회 아픔 나눈다

  • 입력 2007년 4월 19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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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코리아타운 추모예배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기독교교회협의회는 17일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한인회에서 ‘버지니아공대 희생자 추모 촛불 예배’를 올렸다. 예배에는 한국인 지역 지도자들과 교계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LA 코리아타운 추모예배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기독교교회협의회는 17일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한인회에서 ‘버지니아공대 희생자 추모 촛불 예배’를 올렸다. 예배에는 한국인 지역 지도자들과 교계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 충격의 교민들 “후폭풍 막아라” 부심

“이제 충격에서 벗어나 희생자 유족과 슬픔을 함께 나눌 때입니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용의자가 한국인 학생으로 밝혀지면서 경악과 충격에 빠져들었던 미국 한인 사회가 차분하고 단합된 모습으로 위기에 대처할 것을 다짐하고 나섰다.

교민들은 사건의 후폭풍을 경계했으나 미국 경찰의 발표 뒤 만 하루가 지난 18일 오전까지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을 겨냥한 특별한 적대 행위나 부정적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미 워싱턴 포스트는 사상 최악의 총기 참사가 빚어진 버지니아 주에서 한국의 서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한국인이 미안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고 18일 보도했다.

○…워싱턴, 버지니아, 메릴랜드 등 미국 3개 지역 한인회와 교회협의회는 18일 비상대책위원회를 열고 추모기금 조성, 미국 언론 홍보 대책, 조문단 방문을 비롯한 구체적 대처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김영근 워싱턴한인회 상임고문은 “희생자 유족과 슬픔을 나누기 위해 추모 기금을 조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며 구체적인 기금 조성 계획을 곧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뉴욕 교포사회 원로인 김영만 전 한국상공회의소(KOCHAM) 회장은 “이번 사태로 ‘안티 코리안’ 정서가 파급될 우려가 있지만 한인 사회가 이를 계기로 더욱 노력하면 미국 사회에서 ‘모범적인 이민자’라는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식 주미 대사도 17일 워싱턴 교민 사회 주최로 열린 추모예배에 참석해 “가슴에서 우러나는 조의를 희생자 가족과 미국 전체에 표하고 그들의 슬픔을 나누자”며 미국 사회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자성하는 뜻에서 32일간 교대로 금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뉴욕, 뉴저지 지역 한인단체들도 이날 저녁 특별대책회의를 열고 희생자 추모 집회 추진위원회를 결성한 것을 비롯해 미국 전역으로 추모 집회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날 본보 취재진이 만난 대부분의 미국인은 “인종, 민족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사건의 본질은 구멍 뚫린 미국 사회의 안전 시스템”이라고 잘라 말했다.

버지니아공대 존 돌리 교무부처장은 17일 “모든 유가족을 만났는데 아무도 한국에 노여움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고 밝혔다며 돌리 부처장을 면담한 권태면 워싱턴 총영사가 전했다.

이날 오후 버지니아공대에 열린 추모식에 참석한 네이선 데이비스 씨는 “한국인은 걱정할 필요 없다. 이번 일은 잘못된 개인의 일로 국한돼야 한다. 유족은 얼마나 화가 나겠느냐. 그렇지만 인종이나 국적이 미국인의 감정에 개입할 여지는 없다”고 말했다.

○…미국 주요 언론들도 조 씨가 ‘8세에 미국에 온 이민자로 한국 국적을 가진 영주권자’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지만 조 씨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지 않고 ‘미국에서 자주 발생해 온 전형적인 캠퍼스 총격 사건’이라는 시각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수가 일으킨 사소한 마찰로 전체가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교민 사회에선 여전히 신중론이 강하다.

이날 미주 한인방송인 라디오코리아가 마련한 토론회에 전화를 걸어 온 한 교민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들이 다른 학생들이 침을 뱉는 등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화장실에서 연락해 와 학교로 달려가서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인터넷엔 학교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다고 호소하는 유학생들의 글이 몇 건 올라왔다. 일부 학부모는 “내년 대입이 걱정된다. 한국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기도 했다. 학부모들은 “하버드대에 진학한 인도계 여학생이 표절 문제를 일으키자 그 학교 출신자들이 몇 년 동안 하버드대에 진학하는 데 애를 먹었다”는 사례를 들기도 했다.

미국 학교도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한국인 학생 비율이 높은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 주의 랭리고교는 한국 학생들에게 “내일(18일) 등교를 자제해 달라”고 주문했다.

조 씨가 졸업한 웨스트필드고교도 “한국인 학생이 등하교 스쿨버스에서 불의의 피해를 볼 수 있다”며 학부모가 등하교 때 동행할 것을 당부했다. ○…이번 사건은 뜨겁게 진행돼 온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추진 운동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우려된다. 한인 단체들은 결의안 채택을 촉구하기 위해 19일 벌일 예정이었던 ‘로비 데이’ 행사를 취소했다.

한편 정부는 이번 사건이 한미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미 행정부와 다각적인 접촉을 벌이고 있다.

미 국토안보부와 국무부는 이날 한국 외교통상부에 “미국 정부는 이번 사건이 한미 관계와는 무관한 사안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18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보낸 위로 전문에서 “희생자와 부상자, 그 가족, 그리고 미국 국민에게 위로와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부시 대통령의 지도력 아래 사건이 조속히 수습돼 충격과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밝혔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韓美 학생들 추모식서 포옹-악수하며 위로”

버지니아공대 한인학생회 하동삼 지도교수

“이번 사고로 희생된 사람의 유족이나 부상자들을 방문해 위로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조승희 씨의 무자비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32명이 사망한 버지니아공대 전기전자공학과의 하동삼(사진) 교수는 “적절한 시기에 버지니아공대와 지역사회에 위로와 유감을 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 교수는 이 학교의 한인학생회 지도교수를 10년간 맡아왔다.

그는 18일 새벽(한국 시간) 버지니아공대 캐슬 콜로세움 농구 경기장에서 열린 추모행사에 참석한 직후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추모행사에 참석했던 미국 학생들이 한인 학생들과 아무렇지 않게 포옹과 악수를 할 정도로 미국 학생들은 이번 사건을 개인 문제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인터뷰 내내 “한인학생회 소속 학생들과 원만한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현지 상황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지 말아 달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이 한국인이란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위축된 학생들이 있어 한인학생회장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중”이라고 말했다.

또 하 교수는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학교 측에서도 한인학생회에 ‘이번 사건으로 한인 학생들의 피해나 불이익은 없을 것’이란 뜻을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18일(현지 시간) 오전에는 학교 본부가 한인학생회와 다른 외국 학생회가 참석하는 국제 학생회 회의를 열어 이번 사태를 논의할 예정이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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