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포퓰리즘]거리마다 “분배” 시위 몸살

  • 입력 2007년 1월 6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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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 vs 호화빌라 빈부 격차가 극심한 중남미 국가에선 호화로운 빌라와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촌을 번갈아 만날 수 있다. 왼쪽은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외곽에 펼쳐진 판자촌, 오른쪽은 시 북쪽에 있는 국립공원 아빌라 산 중턱의 부유층 거주지. 베네수엘라에서 란초로 불리는 판자촌은 브라질에선 파벨라, 아르헨티나에선 비자로 불리며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카라카스=김영식  기자
판자촌 vs 호화빌라 빈부 격차가 극심한 중남미 국가에선 호화로운 빌라와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촌을 번갈아 만날 수 있다. 왼쪽은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외곽에 펼쳐진 판자촌, 오른쪽은 시 북쪽에 있는 국립공원 아빌라 산 중턱의 부유층 거주지. 베네수엘라에서 란초로 불리는 판자촌은 브라질에선 파벨라, 아르헨티나에선 비자로 불리며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카라카스=김영식 기자
브라질 상파울루 시내에서 20년째 개인택시를 운전해 온 루도비쿠 시아라미콜리(60) 씨.

20년 전엔 대기업에서 근무했다는 그는 아내와 맞벌이를 하면서도 자신이 중산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브라질에 중산층이 있나요. 부유층과 빈곤층만이 있을 뿐입니다.”

식료품 비용은 저렴하지만 청소도구나 자동차 부품과 같은 ‘중산층용 품목’이 비싸 살기가 고단하다는 설명이다. 물론 시아라미콜리 씨의 ‘엄살’은 엄청난 부를 쌓은 부유층을 의식한 상대적 박탈감에서 나온 측면도 없지 않다. 국민의 40%가 그날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게 중남미 국가 대부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없다’는 그의 푸념도 최근 조금씩 달라졌다. 중남미 국가의 경제성장으로 중산층의 비중이 다시 커지면서 이들이 포퓰리즘을 견제하는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 포퓰리스트의 나라

중남미 좌파의 기수를 자처하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빈약한 중산층과 빈부격차의 확대라는 토양을 바탕으로 포퓰리즘을 적절히 활용해 왔다. 부유층 중심의 정권하에서 외면당한 빈곤층은 차베스의 ‘은혜’에 표로 갚는 유권자가 됐다.

방학이 시작되던 지난해 12월 15일 베네수엘라 국립중앙대 교정에서 만난 약학과 2학년인 프란시스 블랑 씨는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잘 수 있게 해준 차베스 대통령이 좋다”고 말했다.

페론주의자임을 내세운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인위적인 가격통제와 대중동원으로 나라를 이끈다. 이른바 냄비시위로 알려진 피케테로(피켓 시위대)는 하루에도 몇 차례 시내 도로를 점거하며 정치적 요구를 일삼는다.

그러나 이런 포퓰리즘 정책은 과거 기득권 세력의 일방통행과 속성상 다를 바 없다. 특정 계층만을 위한 정책 추진은 이번에는 거꾸로 가진 자들을 압박해 여전히 사회를 둘로 갈랐다.

7년간 해외원조금으로 380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는 차베스 대통령의 통 큰 행보는 국내경제의 건실한 성장을 외면했음은 물론 국내 여론을 양극단으로 분열시켰다.



○ 부패의 그늘

“차베스 대통령 측근의 집에서는 강아지도 100달러짜리 지폐를 갖고 논답니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만난 외국계 기업인은 현지인들 사이에 떠도는 얘기를 이렇게 전했다.

현지화 볼리바르를 달러로 환전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해 베네수엘라 국민은 달러를 구경하기조차 어렵다. 나흘간 돌아다녔지만 카라카스 시내에서는 환전소를 찾을 수 없었다. 차베스 대통령이 역대 집권자의 해외 재산도피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이런 명령을 내렸다지만 정작 측근들의 부정부패는 과거 지주들이 기득권을 형성했을 때나 포퓰리스트 집권기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카라카스 시민들은 비꼬았다.

브라질의 부정부패는 워낙 유명하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은 집권 1기를 마무리하면서 “친구나 측근들로 정부를 조직해서는 안 된다”고 자아비판을 했다. 자신이 만든 노동자당(PT) 인사들로 정부를 구성했지만 PT가 야당 의원에게 불법 자금을 제공한 것은 물론이고 각종 부패 스캔들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

아르헨티나에서는 소규모 공장이 모두 불법으로 운영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다. 합법적으로 운영해 100원을 벌면 150원을 각종 세금과 뇌물로 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중남미 중산층의 새로운 도약과 한계

1998년 브라질 경제위기 이후 얼마 되지 않던 중산층은 몰락하다시피 했다. 중남미 대부분 국가의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회복세를 보여 왔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4년간 평균 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브라질의 2006년 무역흑자는 460억7700만 달러로 사상 최대치. 중남미 국가 전체의 평균 성장률도 2004년 5.5%, 2005년에는 4.3%에 이른다.

경제가 살아나면서 중산층도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생애 첫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집을 장만한 노동자층 유권자들이 신흥 중산층을 형성하며 포퓰리즘 정책을 경계하는 새로운 기류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빈부 격차라는 고질병이 해소되지 않는 중남미의 특수 환경에서 포퓰리즘의 유혹은 피할 수 없는 굴레다.

포퓰리즘의 원조격인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은 예산 낭비와 경제 왜곡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지주과두제를 상당 부분 청산했으며 1940년대 후반 이후엔 산업화를 통한 성장을 골고루 분배했다는 인식이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에 널리 퍼져 있다. 과거 자신들의 이익만 챙겼던 중남미 국가의 기득권 세력이 이젠 빈곤층을 위한 정책 개발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포퓰리즘이 미친 긍정적 측면의 하나로 풀이된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이성형 교수는 “중남미에서는 유럽적인 시각에 따른 좌파 우파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포퓰리즘을 향한 대중의 요구가 살아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상파울루·카라카스·부에노스아이레스=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아르헨 일간지 사장이 본 포퓰리즘▼

“포퓰리스트는 대중과 직접 접촉하면서 거짓된 미래를 약속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야만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일간지 엘 디아 사장인 호르헤 파스세토(사진) 씨는 “투표라는 민주적인 절차만을 거쳤다고 해서 민주주의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포퓰리즘의 허상을 꼬집었다.

2002∼2004년 국제언론인협회(IPI) 회장을 지낸 그를 엘 디아 사장실에서 인터뷰했다. 그는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의 다른 축인 사법부와 입법부를 힘으로 누르려고 한다”며 “이는 국민 전체의 대표가 되어야 할 국가 지도자가 국민 일부만의 대표자로 전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빈부격차가 극심한 중남미 지도자들은 포퓰리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텐데….

“빈곤층이 많을수록 포퓰리즘이 만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민의 상당수가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한 것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중남미에선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포퓰리즘의 최절정에 다다른 인물이다. 그는 석유 판매대금을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다. 흔히 포퓰리스트가 부(富)를 공평하게 분배한다고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차베스 대통령은 돈으로 유권자를 살 뿐이다.”

―포퓰리즘의 원조격인 페로니즘은 오늘날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페로니즘은 포퓰리즘과 다를 바 없다. 페론주의자들은 국가기관을 힘으로 누르고 통제함으로써 나라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지 않게 만든다. 자기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이들 페론주의자는 언론의 자유와 비판을 서서히 없애 나가려 획책한다.”

―페론주의자를 자처하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언론정책은….

“국민은 언론을 통해 나라를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언론을 ‘제4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창구가 바로 언론인데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지난 3년간 언론 인터뷰를 한 번도 하지 않을 정도로 언론을 무시해 왔다. 정부에 불리한 기사를 쓴다고 언론을 핍박하고, 기분 좋은 기사를 쓰는 언론에 상을 주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정책이다. 정부는 언론이 국민의 자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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