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대혁명 40주년]한국 지식인에 미친 영향

  • 입력 2006년 5월 1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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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중국 대륙을 흔들었던 문화대혁명(문혁)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군사독재 정권이 일방적 반공교육을 바탕으로 반민주적 통치를 했던 1970, 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는 문혁에 대한 호기심이 은밀하게 확산됐다. 문혁을 ‘민중의 자발적 참여와 헌신, 도둑이나 악인이 없는 사회, 관료제나 기존 권위에 억눌리지 않는 자유로움 등을 갖춘 사회주의적 인간 개조가 성공한 사례’로 평가한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 등 리영희 교수의 일련의 저서는 운동권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다. 문혁에 대한 리 교수의 평가는 한국 지식인들, 특히 386세대의 이념관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촉매였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지난해 6월 ‘전환시대의 논리’를 언급하며 “왼쪽 눈은 감긴 채 오른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도록 강제되던 시절, 리 교수는 우리가 두 눈 뜨고 세상을 보도록 인도했다”고 격찬했다.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읽은 대학생들은 ‘진실과 허위가 혁명적으로 뒤바뀌는 듯한 충격’을 맛보며 문혁을 받아들였다. 대다수 학생이 이를 통해 의식화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386 운동권 출신인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조직국장은 “우리는 문혁을 ‘리영희’라는 프리즘을 통해 봤다”며 “그가 묘사한 문혁은 마치 이상적 인간들이 만들어 낸 유토피아 같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유럽의 좌파도 문혁에 대해 열광했다. 송영배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1970년대 초반 유럽 유학 당시 문혁을 접하고 연구 방향을 관념철학에서 헤겔과 마르크스 쪽으로 돌렸다”며 “당시 ‘광둥 사람이 베이징에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그걸 주운 사람이 광둥까지 와서 전해 줬다’는 얘기가 진실처럼 떠돌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한국 대학가에서 문혁이 높이 평가되던 1980년대에 이미 중국에선 문혁이 홍위병의 집단 광기와 파괴, 지식인의 하방, 수많은 인명 피해, 국가의 황폐화를 초래해 파산 선고를 받았다.

신지호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면서 문혁은 일종의 정신적 지주이자 동경의 대상이 됐다”며 “중국이 폐기한 뒤 10년이 지나도록 문혁을 동경한 것은 운동권의 지적 게으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혁에 대한 긍정적 시각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이어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 후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문혁의 정확한 실상이 알려지면서 문혁에 대한 동경은 차차 사라졌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문혁을 ‘자신들의 이념을 절대적 선(善)으로 맹종하며 가치의 다양성을 부인하는 세력에 의해 한 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인 폭력을 겪을 수 있는지를 입증한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하며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아직도 문혁을 동경했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대중 정권 때부터 정권을 등에 업은 이른바 진보적 단체들이 보수 세력을 ‘수구 반동’이라고 비난하며 거세게 공격하고 나서자 많은 보수 인사들은 “‘문혁적 분위기’가 재연되는 것 같다”며 우려했고 그 와중에 심각한 이념 갈등이 빚어졌다.

2001년 소설가 이문열 씨의 신문 기고로 벌어진 ‘홍위병’ 논쟁도 그중 하나로 꼽힌다. 이 씨는 당시 자신이 쓴 언론사 세무조사 관련 기고에 대해 진보를 표방한 단체들이 집중 공격을 하자 이를 홍위병에 비유했다가 책 화형식과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전상인(사회학)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문혁으로부터 정신적 감화를 받고 5·18민주화운동으로 보강된 386세대의 이념 지향이 반(反)지성주의의 원인이 되고 있다”며 “아는 것도 없고 행동에도 절제가 없는 그들이 ‘반엘리트 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전문가들이 말하는 文革의 교훈▼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는 이모(45) 씨는 “중국 사람들이 근면하고 끈질기고 자존심 강하지만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이를 시인하는 아량은 부족할 때가 있다”며 “중국 사람들이 ‘두이부치(미안하다)’라는 말을 여간해선 잘 하지 않는 것이 바로 40년 전 문화대혁명이 가져다 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해 버리는 순간, 바로 적으로 몰렸던 무서운 사상 전쟁이 가져다 준 상흔은 그들에게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설명이었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문혁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못한다. 40년 전 남의 나라 일이지만, 이념의 분열로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는 우리는 그들의 경험에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신용철(중국사상사) 경희대 명예교수는 “문혁을 변곡점으로 중국 사회가 새로운 역사를 맞았기 때문에 문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중국을 이해할 수 없다”며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국민 총동원 형태의 노동력 강제징집으로, 봉건을 탈피하려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념적이며 유토피아적 이상을 좇았기 때문에 사회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결국 인간의 삶의 향상은 이념이 아니라 실용이라는 것을 문혁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유장근(역사학) 경남대 교수는 문혁이 남긴 인간관계의 내상(內傷)을 꼽는다. 그는 “문혁이 비판받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인간성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학생이 스승을, 이웃 간에 고발하고 비판했던 게 당시의 상황”이라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진행됐지만 사실은 권력 다툼에 이용되었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어 버린 경험은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에게 큰 좌절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문혁에 대한 한 중국 지식인의 회고서인 ‘우붕잡억’(저자 지셴린·季羨林)을 번역한 김승룡(한문학) 부산대 교수는 “그 어떤 이념이든 그것은 결국 인간다움을 지키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존엄권이 지켜지는 세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저자의 신념은 각종 주의·주장에 지친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리영희씨 지난해 대담집서 시각 바꿔▼

문화대혁명을 한국에 긍정적으로 소개한 대표적인 인사는 바로 리영희(李泳禧·사진) 교수다. 리 교수는 1970년대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의 저서를 통해 마오쩌둥의 문혁을 “인류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인간 개조의 대실험”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리 교수도 시간이 흐르면서 문혁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평가를 바꿨다.

“내가 문혁의 와중에 그것을 보고 쓰고 할 때에는 진실의 전모를 다 파악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다른 외국의 학자들에 비해 월등히 열악하고 한정된 범위의 정보밖에 없었던 나에게는 그 후 알려진 이른바 ‘홍위병’의 반(反)문화적 파괴 행위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부정적 사실은 정확히 파악할 방법이 없었어요.”

리 교수는 지난해 3월 출간된 임헌영(任軒永) 민족문제연구소장과의 대담집 ‘대화’(한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문혁에 대한 자신의 평가에 문제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는 1994년 펴낸 책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에서는 “비판과 반성을 거친 문화대혁명의 사상과 이론은 앞으로 상당 기간 자본주의적인 타락과 시장경제라는 이름 밑에 들어가고 있는 물신숭배, 물질주의, 그에 따른 폐단을 바로잡고 정화하고 적절한 위치로 돌려놓는 역할을 하는 역사적인 효용을 꾸준하게 지닌다고 상당히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레닌은 그것을 길게 잡았는데 중국에서 지나치게 단시일 내에 조급한 성과를 기대한 나머지 모든 8억 인간에게 한결같이 혁명가가 되기를 요구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결국 많은 제도적 물질적 피해를 보게 돼 버렸다”고 말했다.

문혁에 대한 현재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12일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리 교수는 “더는 현실 문제에 대해 연구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관심도 없다. 개인 생활에 몰두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나간 이야기에 대해선 이제 할 얘기가 없다. 문혁이 몇십 주년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병 고치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형편이다”라고만 말했다. 그는 2000년 뇌출혈로 쓰러져 신체마비와 언어장애를 겪은 이후 사실상 연구 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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