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를 지켜라” 일본 韓人변호사들이 뛴다

  • 입력 2006년 1월 9일 03시 02분


《일본 사회에서 온갖 불이익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고 재일동포의 인권과 지위 향상을 위해 힘썼던 김경득(金敬得) 변호사가 지난해 12월 28일 위암으로 별세했다. 일본의 첫 외국인 변호사였던 김 변호사는 재일동포 지문날인 거부사건, 일본군 위안부 전후 보상 소송 등을 맡아 외롭고 험난한 투쟁을 벌여 왔다. 김 변호사의 타계를 계기로 일본에서 한국 국적을 지키면서 재일동포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는 재일동포 변호사들을 조명한다.》

재일동포 인권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온 김 변호사. 그가 몸담았던 ‘우리’라는 법률사무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던 재일동포들과 아픔을 함께했다.

재일 한인 변호사들은 그의 타계 이후 ‘한국인의 이름으로’ 더욱 활발한 인권활동을 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자신을 본다’=김 변호사는 1980년대 일본에서 외국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지문날인 제도에 맞서 이를 철폐하라는 지문날인 거부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민연금제에 가입할 수 없는 재일동포들을 대리해 제기한 국민연금 소송, 도쿄도 관리직 채용 거부 취소 소송 등 동포들의 인권과 관련한 소송에는 빠짐없이 그가 있었다. 또 전후 보상 소송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보상을 촉구하기도 했다.

서울대 법대 정인섭(鄭仁燮·51) 교수는 “1980년대 이후 재일동포의 인권운동에서 김 변호사가 빠진 적이 없다”며 “그가 보인 열정은 재일동포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생존 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통해서 자신을 긍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 타계 그 이후=일본에는 김 변호사처럼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변호사로 활동하는 재일동포가 60여 명에 이른다.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배훈(裵薰·53) 변호사는 김 변호사 다음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재일동포 2세인 배 변호사는 교토(京都)대 상대를 졸업한 뒤 1985년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배 변호사는 1997년 일본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직선기선 영해 안에서 조업했다는 이유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에 나포돼 구속된 대동호 선장 김순기 씨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아파트 입주를 거부당한 후 오사카 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던 강유미(41·여) 변호사도 주목받고 있는 인권운동가다. 강 변호사는 “한국인인 나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 줄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재일동포의 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이름으로=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재일동포 변호사 60여 명 중 대부분이 40, 50대의 재일동포 2, 3세다. 최근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식 변화로 한국 국적을 고수하는 20, 30대 젊은 변호사들도 생겨나고 있다.

박찬운(朴燦運) 인권위원회 인권정책본부장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은 재일동포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문제”라며 “재일동포 변호사들이 한국인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기간 자신은 물론 사회와 싸운 후 얻게 된 결과”라고 말했다.

재일동포 변호사들은 최근 재일 한국인의 참정권 요구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재일동포들은 아직 일본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에서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배 변호사는 “일본 사회의 이방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김 변호사의 뜻을 이어받아 참정권 요구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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