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066년 英 헤이스팅스 전투

  • 입력 2005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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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6년 10월 14일 영국 헤이스팅스 들판에 밤이 찾아왔다.

말발굽에 으스러진 시체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부상자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판을 뒤흔들었다.

승리를 거둔 노르망디공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비인 에디스를 불렀다.

“당신 남편의 시체를 찾으시오.”

들판을 헤매던 에디스는 한 시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체는 거의 알아볼 수 없었지만 가슴에 새겨진 문신만큼은 선명했다. 자신의 이름 ‘에디스(Edith)’. 그는 남편 해럴드 왕의 주검 앞에서 절규했다. 영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된 헤이스팅스 전투가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8세기 이후 노르망족은 유럽의 공포였다. 바이킹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그들은 911년 프랑스에 침입해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다음 목표는 바다 건너의 섬나라 잉글랜드였다.

1066년 10월 14일 영국 동남부 헤이스팅스에서 노르망군과 잉글랜드군이 맞붙었다. 초반전은 잉글랜드군의 우세. 잉글랜드군의 ‘방패벽’ 앞에 노르망군의 공격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노르망군 수장 윌리엄 공의 머리를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으니 바로 ‘거짓 패주’ 전략이었다. 노르망군을 거짓 도주시켜 잉글랜드군이 추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잉글랜드군의 견고한 방패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해가 질 무렵 잉글랜드군을 이끌던 해럴드 왕이 전사하면서 대혈전은 막을 내렸다. 윌리엄 공은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고, 역사는 그에게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전쟁은 단 하루 만에 끝났지만 영국 역사는 영원히 바뀌었다.

300년 넘게 잉글랜드를 지배해 온 앵글로색슨 왕조는 무너졌다. 새로 들어선 노르망 왕조는 유럽 대륙의 문화와 봉건제도를 옮겨왔다.

가장 큰 변화는 언어. 노르망족이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상류층 언어로 부상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영어에 프랑스어 어원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해가 질 날이 없다’는 대영제국의 출발점도 여기서 시작됐다. 방어적 성향을 가진 앵글로색슨족과는 달리 전쟁을 선호하는 노르망족은 영국의 영토 확장 야심에 불을 지폈다.

그날 그 들판. 창과 방패, 화살과 도끼가 난무하던 그 전쟁에서 승리의 여신이 잉글랜드 해럴드 왕의 손을 들어줬다면 세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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