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산으로 ‘K등산’의 역사
근대적 등반문화 1910년쯤 시작
“건강-휴식 위해” 1980년대 확산
1940년 11월 3일 조선인 등반가 50여 명이 북한산 인수봉에 올랐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정신적 탈출구’였던 등산은 오늘날 많은 이들의 여가 활동이 됐다. 한국산악회 제공
“살아 있는 역사이니 가 보아라. 영웅심을 기르기 위하여 가거라…그리하여 조선의 산 많음이 긴절(緊切)한 의미가 있도록 할지어다.”(1917년 잡지 ‘청춘’에 실린 ‘산에 가거라’에서)
일제강점기 문인이자 학자였던 최남선(1890∼1957)은 등산을 통해 한민족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길 권했다. 이후 1920년대 여러 문인이 신문과 잡지에 잇달아 명산 기행문을 냈고, 이는 조선인의 등산 의욕과 자긍심을 자극했다고 한다.
올 1월 1일 등산객으로 붐비는 서울 남산. 뉴스1올해도 새해를 맞아 전국 명산에 올라 기운을 받고, 마음가짐을 다잡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선호하는 취미 상위권에 언제나 꼽히는 등산이 최근엔 한국 여행을 오는 외국인들까지 사로잡고 있다. ‘K등산’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조선시대 선비들은 등산이 아니라 ‘유산(遊山·산으로 놀러 다님)’을 했다. 박찬승 한양대 명예교수(사학)는 유산을 “명산 속 사찰을 찾아 보고, 골짜기에서 물놀이하고, 시문도 짓는 선비들의 유람 여행”(산악연구 2호, ‘한국 근대 등산문화의 형성과 그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산을 유람하는 건 선조와 선배 학자의 길을 되짚으며 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사대부의 나들이, 뱃놀이와 꽃놀이’, 김정운 지음·한국국학진흥원 기획). 17세기 경북 예안의 사대부 김광계(1580∼1646)는 퇴계 이황이 수련을 했던 청량산에 여러 차례 오르며 산을 수양과 성찰, 공부의 장으로 이용했다. 사대부의 유산 문화는 1920년대까지도 영향을 줘 많은 지식인들이 명산을 찾고, 기행문인 ‘유산기’를 남겼다.
오늘날처럼 주로 주말에 도심 근교 산을 오르는 ‘여가 스포츠’로서의 등산은 1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지난해 12월 발간한 연구서 ‘한국 근대 등반, 역동의 한 세기’(오영훈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계약교수 지음)에 따르면 근대적 등산 문화는 1910년 전후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처음엔 통감부 등 소속의 일본인들이 구성한 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차츰 조선인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오 교수는 “신체를 단련하고 기개를 길러 국권을 되찾는다는 ‘지·덕·체 3육론’의 영향으로 회사나 학교 등 단체에서 등산 모임이 생겨났다”며 “조선인에게 등산은 ‘상상으로나마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탈출구’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1921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백두산행’은 당대 등산에 대한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조선 산악의 조종(祖宗)이며 두뇌다. …백두산 같은 산에서 수많은 영웅이 태어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1930년대 들어선 조선총독부도 등산을 권장했다. 등산로를 정비하고, 학교에 산악부를 설치했다. 1942년엔 ‘식민지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전환시킨다’는 연마육성(鍊磨育成)을 목적으로 등산을 보급하기도 했다. 1931년을 전후해 일본인들이 조선산악회를 조직하자, 이에 자극 받은 조선인 산악인들은 1937년 ‘백령회(白嶺會)’를 결성해 산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급속히 경제가 성장한 1960, 70년대엔 등산이 ‘극복과 경쟁의 활동’이 됐다. 국위 선양을 위한 히말라야 등정이 국가적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건강과 휴식을 위해 산을 찾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건 1980년대에 들어서다.
오 교수는 “정부 주도하에 국립공원 주변 리조트와 탐방로가 조성되고, 전국의 도로망이 개선된 것과 맞물리면서 등산은 대중적 취미가 됐다”며 “모험적인 뉘앙스가 빠진 ‘산행’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 이후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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