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역사공동연구위 3년결산]한일 근현대사 심각한 이견

  • 입력 2005년 6월 1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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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근현대사는 물론 중세사, 고대사에 걸쳐 19개 주제를 연구했다.

시대별로는 고대사 3개, 중세사 3개, 근현대사 13개 주제였다. 수에서도 확인되듯이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분야는 근현대사였다.

▽첨예한 시각차 보인 근현대사=양측은 근현대사 분야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 자체가 부당하다는 인식과, 식민지배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수탈적 측면과 구체적 현실생활의 다양성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다른 대목에서는 심각한 의견차가 노출됐다. 전근대적 동아시아 국제질서(조공체제)에 대한 인식에서 일본은 “조공체제는 종속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이 중국과의 이런 종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이에 대해 “조선은 자주적 나라였다”면서 “청일전쟁이 근대적 국제질서를 가져왔다는 주장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숨기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을사늑약(1905년)과 강제합방조약(1910년)에 대해서도 일본은 국제법상 합법적 절차를 거쳤고, 열강도 이를 승인했기 때문에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조약에 필요한 비준, 문서 형식에 문제가 있었고 강제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무효라고 반박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근대성 문제에 대해서 일본은 과학적 경영기법, 대규모 백화점, 신여성 등이 출현했다는 점에서 근대성을 발현시켰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근대성이 일부 보이긴 했지만 이는 일제의 수탈적 식민지배 구조가 낳은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항일민족운동에 대해 한국은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음을 다양한 사례로 제시했다. 일본은 이에 대해 한국의 민족주의는 국가와 국민의식의 희박, 리더십의 결여 등 많은 문제점을 지녔기 때문에 독립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말∼1945년 일제의 전시 강제동원과 관련해서 일본은 한국인들의 저항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조선인의 자발적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암시를 담고 있는 주장이다. 한국은 오히려 이야말로 이 시기 일본의 통치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폭압적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해 일본은 협정 체결로 식민지 지배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배상·보상의 의무가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협정 체결 당시 일본이 청구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군 위안부 등의 강제동원 사실이 논의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임나일본부설’ 허구 인정한 고대사=고대사 영역은 4∼6세기 한일관계사로 제한됐다. 가장 많은 논쟁이 예상된 부분은 일본의 야마토 조정이 고대 한반도 남부에 임나(任那)라는 거점을 두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었다. 다행히 일본 학자들은 “지금의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 이 학설은 거의 인정받지 않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다만 일본 학자들은 일본이 한반도 남쪽에서 활동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려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의견 대립 피한 중세사=15세기 전기까지 한국에 오고간 일본의 사신들 중 상당수가 일본의 번주나 장사치들이 일본 국왕의 사신인 것처럼 가장해 보낸 위사(僞使)였음에 합의가 이뤄졌다. 또 중세에 일본에 간 조선의 사절인 통신사는 선린우호차원에서 파견된 것으로 일본에 대한 조공사절이 아니었으나 일본에서 국내정치용으로 이를 조공사절인 것처럼 대내적으로 선전했다는 점에도 합의가 이뤄졌다.

임진왜란과 관련해서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이뤄진 한일 역사연구가 전쟁을 미화시킬 수 있으므로 참혹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한일 역사 공동연구 보고서의 주요 쟁점
쟁점 한국 측일본 측후소샤 교과서
임나일본부설일본 세력의 한반도 남부 지배는 사실이 아니다그런 실체는 없었지만 한반도 남쪽에 일본세력이 활동한 증거가 있다전라남북도와 충청북도 일부까지 포함한 임나일본부의 실체 인정
위사(僞使)15세기 전까지 일본의 번주나 상인들이 일본 국왕의 사신을 참칭한 위사를 조선에 파견위사의 존재 인정기술 없음
조선통신사일본에 대한 조공사절이 아니다조공사절이 아니지만 일본 국내 선전용으로 ‘조공사절’로 포장했다쇼군(將軍) 축하사절단으로 폄훼
임진왜란전쟁 미화시켜서는 안 되고 전쟁 막아야 한다는 역사인식 필요하다한국 의견에 동의침략을 출병으로 서술, 인적 물적 피해는 축소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조선은 중국과 조공관계를 맺었으나 자주적인 나라였다청과 조선의 조공관계는 종속관계였다조공관계는 종속관계
을사늑약과 강제합방조약강압에 의해 체결된 데다 절차상 하자로 조약 자체가 무효다국제법적으로는 유효한 조약이다국제법적으로 유효
식민 지배의 근대성 식민지배가 근대성을 낳았다 하더라도 본질은 수탈적 식민지배의 결과일 뿐이다식민지배는 부당하지만 그 결과로 근대화가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식민지정책이 한국 발전에 기여했다
항일독립운동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다내부의 리더십 결여 문제가 있었다기술 없음
전시강제동원 강제동원에 대한 조선의 저항이 불가능했다는 점이야말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폭압통치를 입증한다강제동원이 있었으나 한국인의 저항이 별로 없었다징용·징병은 인정하면서도 강제성은 희석
1965년 한일협정재협상 필요 배상·보상 문제 소멸 기술 없음
북-일 수교일본의 우경화와 군사대국화가 최대 걸림돌이다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와 핵개발이 최대 걸림돌이다기술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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