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민족주의 바람]요동치는 3國… 확실한 좌표 찾아야

  • 입력 2004년 8월 15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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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에 민족주의 열풍이 몰아닥치고 있다.

중국은 중화제국(中華帝國)의 부활을 꿈꾸며 신저우(神舟) 5호의 발사로 우주공간에 진출하는 한편 동북공정(東北工程) 등을 통해 역사 팽창에 나서고 있다. 일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가 주변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거듭 강행하는가 하면 평화헌법을 폐지하자는 우익의 ‘보통국가론’이 힘을 얻자 재무장화에 착수했다. 한국 역시 남북관계의 해빙 분위기 속에 한미동맹보다 남북간 민족공조를 우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다. 동북아의 민족주의 열풍은 이웃나라 간의 마찰과 대립으로 발전하는 등 심각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빼앗기’를 둘러싸고 한중 양국이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고, 일본과 중국은 아시안컵 축구대회 기간 중 일어났던 중국 관중의 반일 행동으로 ‘축구전쟁’을 치렀다. 이처럼 일상의 문제로 표출되는 민족주의 마찰은 ‘동북아 공동체의 중심적 역할’을 꿈꿨던 한국의 장밋빛 희망마저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전문가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이런 민족주의 열풍의 진원과 지향점, 그리고 한국의 대응전략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 한중일 민족주의 진원지는

최근 한국 일본 중국 3국에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3국간의 역사전쟁과 축구전쟁 등 각종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아시안컵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중국이 패배하자 중국 관중이 일장기를 불 태우고 있다(맨 위). 한국 대학생들이 미군부대에 진입해 미군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가운데).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주변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런 움직임에는 세 가지 배경이 겹쳐 있다. 첫째, 보편성을 강조하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그 반발로 개체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슬람권에서 종교적 양상으로 표출된다면 동북아에서는 주로 역사적이고 경제적 양상으로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냉전체제 종식 이후 동북아 지역의 세력재편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냉전종식 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의 지역패권 노선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의 미일동맹의 강화는 일본의 군사전략적 위상과 역할을 증대시키고 있다. 냉전기간의 분단상황에서 벗어나려는 한반도의 움직임이야말로 이런 세력재편의 뇌관처럼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셋째, 한중일 3국의 내부 정치적 상황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중국의 민족주의 부상 배경에는 △경제적 급성장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 △마르크스 레닌주의나 마오쩌둥(毛澤東)사상을 대신해 공산당 집권의 정통성을 확보해 줄 대체적 이데올로기의 필요성 △내륙과 해안의 경제력 차이, 빈부 격차 등으로 인한 국민 분열을 막고 국가통합을 강화할 동원기제의 중요성 등이 숨어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의 경우는 중국과 반대로 장기화된 경제침체에 그 주된 원인이 숨어 있다는 분석이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됨에 따라 강한 국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는 다시 자신감 회복을 위한 일본의 정체성 찾기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포퓰리즘적 정치행태는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과 함께 일본 국민을 억누르고 있던 금지된 욕망을 분출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 해외파병 등을 활용하고 있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월드컵 4강 등으로 형성된 자신감에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더해지면서 ‘주한미군 철수론’과 ‘동북아 중심 국가론’이라는 행태로 민족주의가 표출되고 있다. 여기에다 노무현 정부는 국내 정치상황을 의식해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다.

● 새 기류의 지향점은 어디인가

한중일 민족주의 열풍의 내부적 상황을 들여다보면 차이점이 발견된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동북아 지역에서의 패권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이 점은 4세대 지도부가 출범한 뒤 노골화하고 있다. 과거 중국의 외교정책은 경제성장을 위해 주변 안정에 초점을 둔다는 뜻에서 ‘빛을 감추고 어둠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를 표방했으나 2002년 16차 공산당대표대회에서부터 ‘평화를 위해 우뚝 선다’는 의미의 화평굴기(和平堀起)로 전환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7월 24일 공산당 정치국 학습회의에서 “경제와 더불어 국방강화가 병행돼야 위대한 중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선언, 과거의 국가목표인 부국(富國)에 강병(强兵)을 추가했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두 가지 양태를 보인다. 하나는 한족(漢族)중심주의의 강화이고 다른 하나는 55개 소수민족을 포함한 중화민족주의의 부각이다. 중국의 고대국가인 하(夏) 상(商) 주(周)시대를 연구하는 단대공정(斷代工程)이 전자의 시도라면, 소수민족의 역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은 후자의 시도다. 또 단대공정이 시간적 확장이라면 동북공정은 공간적 확장을 목표로 한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일단은 평화헌법체제에서 벗어나 동북아 지역에서 미국의 파트너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정상국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 우익이 과거사에 대해 ‘자학사관’ 운운하는 것도 이를 겨냥한 시도다. 그러나 이런 극우파의 논리가 평화헌법체제에 착근돼 있는 일본 시민사회를 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일본 극우파의 위기’라고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반면 한국의 민족주의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 한편으론 부강한 국가를 추진하는 성장주의적 가치를 호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위해 필요한 단합이나 통합을 지향하기보다는 국내 정치적 요소 때문에 기득권 대 반기득권의 대립을 조장하는 분열적 리더십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이 나아갈 길

‘동북아 중심 국가’라는 구호에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중국과 일본을 자극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사실상 대외정책의 90%를 미국에 집중하고 세계 강국을 꿈꾸는 중국으로선 한국이 동북아의 중심 국가가 되겠다는 인식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도 한국이 선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구상을 마냥 반길 리 없기 때문이다. 또 중국과 일본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한국이 현실적으로 중재할 여지도 적다.

그렇다고 동북아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면 한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가교국의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위해 우선 남북교류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또 한중일 역사공동위원회 구성처럼 정부 차원과는 별개로 민간차원의 교류도 모색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에서 형성된 ‘한류(韓流)’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활용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변국가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도록 내부적 통합과 사회적 조정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노르웨이나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국력이 강하지 않더라도 정치안정과 경제성장, 사회통합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주변국가의 팽창을 억제시키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때라는 얘기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 도움말 주신 분들=강준영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교수·김동성 중앙대 정외과 교수·김태호 한림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박두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최원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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