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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4월 17일 16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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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이 묵고있는 쉐라톤호텔에서는 줌 호리야 다리를 건너 강의 서안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티그리스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편도 2차로의 줌 호리야는 전쟁의 상흔에 심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다리 중간에는 이라크 수비대가 바리케이드로 사용했던 차량 3대가 미사일 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뒤집혀져 있고, 검게 그을린 차량엔 5, 6명의 약탈자들이 달라붙었다. 더 이상 뜯어낼 부속이나 있을까. 카메라를 들이대자 "사진 찍는다. 손 좀 봐주자"며 몰려들 기세를 보인다. 서둘러 가속페달을 밟았다.
대통령 궁 입구에 선 미군 초병에게 신분증을 보이며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다른 미군 병사는 몰려온 이라크인들을 밀쳐냈다. 초병의 허락을 받아 한두 걸음 떼는 순간 바로 뒤에서 총소리가 '펑'하고 귓전을 때렸다. 이라크인들이 물러가지 않자 공포탄을 쏜 것이다. 그런데도 이라크인들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들 중엔 딸을 안은 아낙네까지 보였다.
"남편이 대통령궁으로 수비하러 간 뒤 소식이 끊겼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아랍어 가이드 오사마는 총소리에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기자에게 사정을 설명해줬다. 오사마는 "미군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데도 아낙이 헛수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랍어를 할 줄 아는 미군 초병이라면 아마 마음이 무거워졌을지 모른다.
말이 입구지 대통령궁 건물까지는 거의 30분을 더 걸어야 했다. 도중에 200, 300m 간격으로 화려하지만 폭격에 폭삭 주저앉은 건물들이 드문드문 서있었다.
'사담병원'에 들어섰다. 첫번째 진료실인 응급실엔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미군과의 격전중 부상당한 이라크군 병사를 치료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 전속병원답게 방마다 후세인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쿠웨이트 출신인 오사마는 보이는 사진마다 뜯어내린 뒤 상소리를 해가며 발길질을 해댔다.
대통령궁에 이르는 마지막 경비초소에는 이라크군의 탄약과 박격포탄이 포장도 뜯지 않은채로 뒹굴고 있었다. 무기는 물론 군화까지 곳곳에 버려져 있었다. 다급하게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허겁지겁 달아났기 때문이리라. 미군 초병과 실랑이를 벌이던 아낙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은 운이 좋아 봤자 최소한 포로 신세가 됐을 게다.
대통령궁은 바그다드를 처음 찾은 기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궁 옥상엔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장군 동상보다 더 큰 후세인의 대형 얼굴조각이 4개나 붙어있다. 지나가는 스페인 기자에게 이곳이 맞느냐고 확인했더니 "많은 곳 중 하나(one of many)"라는 냉소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입구의 미군 초병이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을 보니 후세인의 궁이 맞긴 맞았다.
대통령궁은 얼굴조각이 방문객을 압도하는 후세인의 집무실과, 맞은 편 50미터 높이의 부속 건물로 나뉘어져 있다. 담백한 모양의 부속건물이 크기는 더 크다. 고작 4개 층이지만 높이가 거의 30, 40미터. 한참 계단을 타고 올라야 한층 한층 올라갈 수 있다. 건물 가운데는 대형 미사일에 맞아 주저앉아 있었고, 그 충격으로 주기둥이 뒤틀려있어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1층엔 배구장 6개를 이어붙인 크기의 손님 대기실과 대형 연회장 등이 들어서 있고 한가운데는 회의실이 배치돼 있었다. 딸린 대형 주방 한 구석에는 은빛 식기들이 먼지와 함께 뒹굴고 있었다. 약탈자들보다 미군이 더 빨랐던 모양이다.
후세인과 그 아들 우다이 쿠사이 등 이라크 전쟁지도부가 모였을 법한 회의실은 ㅁ자 형태로 고급 가죽의자가 놓여 있었다. 회의실 한 쪽의 대형 책장엔 '이라크 역사'와 '동물이야기'라는 제목의 아랍어 전집이 꽂혀있었다. 가이드 오사마는 "동물(후세인)이 동물을 좋아한 모양"이라며 비아냥댔다.
외세에 대항하는 아랍지도자를 자처했던 후세인은 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웠던 함무라비 대왕의 후계를 자처하곤 했다. 조각에도 함무라비의 갑옷을 입은 모습이었고, 최정예 공화국수비대의 1개 사단을 '함무라비 사단'이라 칭했다. 대통령궁 진입도로변에 세운 함무라비 동상은 인류최초의 성문(成文) 법전을 만든 그의 지혜를 상징하듯 저울을 들고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후세인의 저울'은 무엇을 달았을까. 그는 30여년동안 권력의 무게중심에서 경쟁자와 후계자를 시간을 두고 제거하고 키워가는 데 성공했다. 다만 그의 권력저울에는 견제와 균형이 없었을 뿐이다. 권력의 중심에 항상 후세인만이 있었던 것은 그 자신에게나 이라크 국민에게나 비극이었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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